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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부 헌신예배 설교, 디모데후서 1:1-14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청년부 헌신예배 설교, 디모데후서 1:1-14

jo_nghyuk 2023. 4. 30. 01:46
디모데후서 1:1-14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1
디모데서는 제가 지치고 힘들때마다 저를 위로하고 큰 힘을 주는 편지입니다. 이 편지에서 저는 아버지와 같은 스승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디모데의 선배 목회자이자 스승인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정직하고, 유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심한 면이 있었고, 유약한 모습도 많이 보였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사는 데에 있어서 고난 앞에서 움츠러들었습니다. 복음을 비방하는 사람들 앞에서 디모데는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디모데의 믿음은 어머니로부터, 그리고 외할머니로부터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조상이 늘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오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영향을 받은 디모데의 신앙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는 청결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에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4절을 보니 바울이 디모데가 흘리는 눈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네 눈물을 흘리던 것이 생각난다. 네가 보고 싶다.“
바울이 얼마나 제자 디모데를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살다가 힘들면 전화해”
사랑하는 친구나 언니 동생, 형 동생 끼리도 이렇게 말합니다.
“살다가 힘들면 전화해”
이 말은 사랑의 깊은 연대를 보여줍니다. 네가 힘들 때, 내가 언제든지 네 옆에 있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멀리 있어도 늘 너를 보기 원하고, 너와 가까이 하기를 원한다. 바울은 이런 의미에서 ”디모데야, 네가 눈물 많이 흘리던 때를 기억한다. 그때를 기억하니 네가 보고 싶구나.“
돌아가신 저의 장인어른은 장로님이셨습니다. 지금 제 아내를 처음 만나기 시작하고, 아내의 아버지를 만나고 난 후에, 저에게 종종 전화를 거셔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종혁아. 잘 지내? 보고 싶어. 사랑해.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어.“
제가 사랑하는 저의 아버지, 지금은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는 무뚝뚝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걸면, 어, 왜. 하고 받으시고, 끊자.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와서, 여보세요. 하고 받았더니, 어, 왜.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전화 거셨어요. 아, 그래. 알았다. 잘 지내나. 끊자. 하고 전화를 끊으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인어른의 그 전화는 저에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대화도 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늘 전화를 끊고 나면, 저의 마음에 여운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대화는 전염력이 있었습니다. 저는 만나는 청년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남의 장점을 보면 일단 따라하는 편입니다. 그냥 전화해서, 어 보고 싶어서 했어. 사랑해. 기도할게. 아버지에게도 전화해서, 아버지 그냥 전화했어요. 사랑해요. 기도할게요. 

 

2

사랑은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바울은 윽박지르지 않습니다. “내가 네 눈물 많이 흘리던 때를 생각한다. 그 생각하니 너를 또 보고 싶다“하고 편지합니다. 
디모데의 두려움은 사랑 앞에서 녹아내렸을 것입니다. 
사랑은 슬퍼하는 자에게 기쁨을 전파합니다. 바울은 슬퍼하고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내가 너를 만나면 참 기쁠거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내가 기쁘려고 너를 만날거야가 아니지요. 내가 너를 만나면, 우리가 참 기쁠거야. 내가 너를 참 사랑하기 때문에, 너를 만나면 내 기쁨이 가득할거야. 하고 마음을 전하는 겁니다.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제자에게, 또는 영적 아들에게, 영적 아버지인 바울은 사랑으로 다가가 두려움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다가가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냅니다. 디모데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 스승에게는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모르는 것을 부모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이렇게 말하죠. ‘두려워하지 마. 안심해. 이때는 이렇게 하는거야.’
바울은 디모데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이 붙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사에 다시 불을 붙인다는 이 말을 어떤 번역은 Reaktivierung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하고, 사그라지는 불씨처럼 힘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약해지고,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의심에 사로잡히면, 또 죄에 사로잡히면, 성령의 은사의 불씨는 약한 채로 숨겨져 있게 됩니다. 
두려움은 주신 은사를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신 은사가 없어서가 아니라, 두려움이 많아서 은사가 빛을 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는 달란트를 종에게 맡기고 떠난 주인의 이야기와도 비슷합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각각 종들에게 맡겼는데, 다른 종은 주신 달란트, 그 은사를 단련하고 불이 붙게 합니다. 그런데 한 종은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립니다. 주인이 와서 물어보니 두려워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아이러니한 대답입니다. 주신 달란트가 없어서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마치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처럼, 성령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두려움에 사로잡혀 온전히 사용하지 못하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3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의 은사, 라고 하는 말 자체는 하나님이 주신 것,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시고, 구하지 않아도 주고 싶으셔서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면 우리는 자꾸 그 사람을 보고 싶을 뿐 아니라, 뭘 주고 싶어집니다. 시간을 주고, 마음을 주고, 가진 재정을 써서 선물을 주고 싶어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계속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신 능력으로 감당합니다. 우리 능력으로 고난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보다 넘치게 주시는 능력으로 그것을 감당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갇히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보다 주가 주신 능력이 적다면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옥에서도 주의 복음을 전했고, 주의 엄청난 능력을 증언했습니다. 주의 능력은 닫힌 감옥 문도 여셨습니다. 군대에서 저는 우울증에 걸린 적이 있습니다. 수련회 때 잠시 나누었지만, 주의 음성을 들은 후에도 사실은 그 우울증은 단번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서 사라졌습니다. 그것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저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우울증을 이기는 평안이 오기까지 기도하려면 밤낮으로 참 오랜 시간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 처음으로 난독증, 글을 못 읽는 증상도 겪었습니다. 글자가 날라다녔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은 성경은 읽혔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읽을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어서 성경을 계속 읽었습니다. 기도를 계속하고, 성경을 계속 읽다가 저는 하나님의 넘치는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제 안에 많은 은사들이 불이 붙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당시에 북한군과의 경계에 있는 DMZ 철책에서 근무했는데, 너무 깊숙한 산골짜기인 그곳에는 교회가 없어서, 목사님이 없이 장병들끼리 주일에 몇명 모여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읽는게 다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의 넘치는 능력을 경험하고 나니까, 다른 소대에는 예수님을 믿는 장병들이 있는데도 주일에 군종병이 없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일마다 걸어서 왕복 두시간이 걸리는 산을 오르내렸는데 전혀 힘들지 않고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나중에는 옆 소대에서 더 멀리까지 갔습니다. 옆 중대까지 가고, 몇시간을 걸어도 피곤하지 않고 즐거웠습니다. 
제가 갇힌 감옥 문을 열어주신 주님의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고, 다른 사람들을 자유케 하고, 아픈 자를 고치고, 상한 자를 위로하는 것을 보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큰 은혜였습니다. 
바울이 감옥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의 넘치는 능력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8절에서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디모데야, 너는 주님를 증언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라.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나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말아라.“
이 말은, 디모데가 복음에 수반되는 어려움들, 고난들을 피하고 싶었고,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는 이 구절은 ”하나님은 비겁한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라고도 번역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복음의 능력 안에 사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기가 없어서 이전에, 복음의 능력이 넘쳐흐르는 능력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복음의 능력 안에 사는 것,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사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능력을 따라 사는 삶은 고난을 받는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따라 살면, 세상과 충돌합니다. 때로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더이상 내가 살고 싶은 방식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그러한 방식과 손절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그 길이 옳다면, 그 길로 걸어가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절제라는 단어는 깨어 있다는 의미로서 분별있음, Besonnenheit를 의미하기도 하고, 자기를 훈련한다는 의미로서 self-discipline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절제는 자기 훈련입니다. 하고 싶어도 하지 않아야 할 때 하지 않고,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 하는 것이 절제이고 자기 훈련입니다. 
복음에 고난이 수반된다고 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다시 말해 훈련의 부족을 의미합니다. 디모데의 영성의 유약함은 훈련의 부족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늘 경건에 이르도록 힘쓰라.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고 조언합니다. 
오늘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명령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가는 길인데, 넘치는 능력을 따라가는 길인데, 고난을 받는다고 합니다.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제가 군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복음을 전할 때에 저는 많은 어려움과 방해를 경험했습니다. 군종병인 한 고참은 술자리에 참여하지 않는 저에게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 믿는게 어울리지 않는게 아니야”라고 말하며 비웃음 거리로 만들었습니다. 
한번은 초소에서 같이 보초를 서던 고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고참이 새벽중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고참은 후임들을 괴롭히던 악덕한 고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마음이 더이상 후임들을 괴롭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마음을 주셔서, 그 고참은 후임들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괴롭히고 살다가 일주일 정도 그것을 안하니 그것이 괴로웠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많은 사람 앞에서 저를 비난하고 욕을 하며 그 후에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따라가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며, 고난의 길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둠이 익숙한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를 멸시하고 핍박합니다. 자신들이 빛으로 나아오는 것이 너무 싫고 힘들기 때문에 주의 자녀들을 괴롭힙니다. 세상은 빛이신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 않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어두운 세상에 빛이신 주님을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우리가 양이 이리 떼 사이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릴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3장에서 말합니다. 
디모데는 이 박해와 거역하는 현실 속에서 조용히 움츠러 들기 시작했고, 두려워하였고, 은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은 두려워하는 이 디모데와 비슷할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의 십자가 앞에서 이렇게 두려워하며 질문합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이 9절에서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나를 위해 계속하신 그 뜻에 의해, 그리고 부어주시는 은혜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도 은혜로 받는 것이고, 내가 담대하게 달려가고 모든 일을 성실하게 완수하는 것도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준비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기로, 복음의 능력으로 살기로 결단만 하면, 나의 연약함을 다 아시고, 나의 생각을 다 세시는 주님이 때마다 일마다 나의 마음과 생각과 환경 속에서 역사하시고, 감옥 문도 여시고, 인생의 새로운 문도 여시며, 준비하신 놀라운 것을 우리를 위해 보여주시고, 주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4

14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이는 복음입니다. 디모데가 지켜야 하는 아름다운 것은 복음입니다. 
디모데의 은사는 무엇이었을까요. 본문을 통해서 보면, 어머니 유니게와 외조모 로이스가 가졌던, 거짓이 없는 믿음, 청결한 양심의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디모데가 고난 앞에, 핍박 앞에 비겁해지지 않고, 유혹 앞에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은, 이 청결한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에 더 불이 붙게 하는 것 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청결한 양심, 이 달란트를 땅에 묻습니다. 양심을 적당히 타협하고, 복음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떤 사람은 이 청결한 양심의 달란트를 가지고, 신실하고 성실하게 주의 길을 달려갑니다. 자기가 속한 학업과 일터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빛의 삶을 사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치열하게 싸우며 나아갑니다. 이러한 사람, 성령이 주신 이 은사에 불이 붙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복음의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의 친구가 복음에 열정이 없다면, 여러분은 열정이 있다가도 식을 확률이 큽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친구가 복음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청결한 양심과 주께서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사수하기 위해 몸부림 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질 것입니다. 성숙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에서 성숙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와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많은 공동체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만하임 한인교회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머리로 한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개개인이 다 영향력이 있으며, 선한 영향력, 나쁜 영향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곳에서 디모데에게 “너희 성숙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나타나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하라”고 말합니다.
나의 성숙이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나의 전심전력이 공동체에 영향을 가집니다. 반대로 나의 비겁함도 공동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나의 원망과 거스름도 해결하지 않고 가지고 있으면, 다른 지체들에게 영향을 반드시 미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이라 하는 아름다운 것을 맡기셨습니다. 성령 안에서 사랑하는 지체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모인 이 교회라고 하는 아름다운 것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것을 지키기 위해, 어떤 헌신을 드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한 몸을 이룬다면, 내가 내 몸을 청결하게 할수록 교회라고 하는 몸은 더 청결해지고, 거룩한 성령의 임재가 더 강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임재가 이 교회에 가득하기를 바라신다면, 여러분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정결하게 드리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산 제사로 주께 드리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주가 주시는 전신갑주를 힘입어, 하나님의 넘치는 능력이 여러분을 감싸고 흘러넘치게 하십시오. 그 능력을 따라 고난도 이기고, 유혹도 이기고, 마귀를 이겨서, 주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맡기신 이 아름다운 복음과 교회를 반드시 지켜내는 여러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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