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시인의 고뇌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가진 혁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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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고뇌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가진 혁명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jo_nghyuk 2010. 7. 15. 15:39
꼭 50년 전의 그날, 4월 19일 나는 동숭동 캠퍼스의 벤치에 막막한 기분에 젖어 혼자 멍하고 앉아 있었다. 방금 많은 학우들이 교문 밖으로 구호를 외치며 뛰어나가 교정은 거의 텅 빈 것 같았다. 내가 민주주의며 정의와 자유를 생각하면서도 시위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한 장면을 되씹고 있었다. 돈암동에서 대학로가는 버스를 타고 혜화동에 이르렀을 때 한떼의 고등학생들이 한바탕 놀이판에서 놀고 돌아오는 듯한 흥겨운 기분에 젖어 거리에서 낄낄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자못 마땅치 않았다. 나라와 역사를 생각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며 부정을 규탄하고 있다면 저렇게 장난치듯 해서는 안된다, 참된 역사는 진지한 태도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저렇게 우스꽝스런 모습이어서는 안된다고, 속으로 안된다를 거푸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좀더 성숙해지고 힘든 사회를 겪으면서 역사의 진행에 대한 실제를 좀 알고 나서야 나는 그날의 내 생각이 얄마나 순진했는가를 깨달았다. 치열한 역사는 웅장한 팡파레를 울리며 찬연한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구의 말마따나, 희극적인 얼굴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짖궂은 꼴로 일을 벌이고서야 근엄한 현실의 무거운 물길을 엄청난 힘으로 전복시킬 힘으로 충만해질 것이었다.

김병익 4.19 50주년을 말한다. 한국일보 2010.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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