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성령의 인도하심과 젊은이의 심장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성령의 인도하심과 젊은이의 심장

jo_nghyuk 2013. 2. 1. 15:23
"성령을 따라 행한다"라는 것이 단순하게 그때그때 즉흥적인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 된다면 이 또한 반쪽짜리 진리가 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 다음 스텝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도면밀해야 함을, 오히려 그 근신과 절제에 대해서 민감한 계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한다면 나의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안에서 우리는 교모하게 획책을 꾀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로 시작하였다가 자꾸만 스스로의 의로 변질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자꾸만 못을 빼고 내려오는 것은 이러한 과정들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훈련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칭의는 단숨에, 그러나 성화는 서서히 성실한 응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넘어질 때 우리는 자책 가운데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죄를 책망하신 후에, 그를 용서하셨다. 참된 책망은 그를 용서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미로슬라브 볼프는 말하였다. 우리는 무엇이 잘못인가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흐릿하게 만드는 경향이 우리 내부에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옛 자아, 죄된 본성은 죽는 것이 아니라 제어되는 것이다. 제어하였다 생각한 이후에도 무의식 중에서 교모한 술책을 꾸미는 것이 우리의 자아이다. 은혜를 누리고, 자유를 누리며, 기쁨을 누린다 말하지만, 우리의 내부에서 어떤 무서운 계획이 꾸며지고 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를 때가 태반인 것이다. 실상은 선한 것을 추구한다 하면서 나 자신의 유익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의 부인 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의 유익, 즐거움, 욕심을 포기하는 것도 어려운 스스로를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이 그리고 가장 선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도상에서 일어남을 보고 있지는 않은가?
이다지도 인간의 존재는 복잡하며, 규명되어질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내부의 본성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야 하고, 새 본성으로 가득 차는 것을 성령 충만함을 받았다 라고 우리는 표현한다. 매 순간 성령의 인도를 받는 이는 율법 가운데 있지 않다. 
그러나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그 순간" 내가 나의 유익을 꾀하기 시작하고 나는 다시 율법 아래에 놓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해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지성으로부터의, 무의식의 간교로부터의 해방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은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질그릇이다, 라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내부에 폭약을 가지고 있음을 주의하여야 한다. 이미 내부에서 어떤 간교가 벌어지고 있을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속는 것은 한 순간이다. 
그러므로 "참된 책망"만이 우리에게 용서가 될 수 있다. 내가 인도를 받는 중에도 길을 벗어날 수 있는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로 마음이 넓으시다. 그분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내 심령의 깊이를 이해하신다. 나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는 (실로 통제가 불가능한!) 이 깊은 가운데에 있는 미지의 마음을 속죄하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정직함의 회복에 대한 간구인 것이다. 나도 나를 속일 수 있음에 대하여 애통하여야 한다. 나의 가장 정직함과 나의 가장 순전함이 때로는 가장 비열한 술책으로도 이용되어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단순히 무의식의 무저갱에 던져 놓고 위선을 부릴 것이 아니라, 그 무의식의 무저갱의 깊이를 품고 있는 죄인 중의 괴수가 나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실로 죄인 중의 괴수이다. 

그리고 주님은 그 깊은 무저갱을 속죄하신다. 
나의 알 수 없음의 미지의 영역을 덮으신다. 
그리고 용서하신다. 이때 용서만이 "참된 책망"이 된다. 어느덧 나의 깊고 더러운 무저갱은 속죄받았고, 나는 다시 안정된 반석, 그리스도 위에서 시작하게 된다. 옛 사람에 대한 벗겨냄(할례)를 받고, 새 사람에 대한 덮음(입음)을 얻는다. 새 사람은 덮혀지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이며, 구속이며, 의로움이다. 

새 사람은 매일 덮혀져야 한다. 이 사랑이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루도 살 수 없다. 새 사람과 상관없는 하루는 버려진 무저갱의 하루이다. 

여정 중에 우리는 실수할 수 있다. 두려움이 없어야 하며, 동시에 두려워하여야 한다. 전존재를 다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성화를 아무리 성실히 이루려고 해도, 한계가 있다. 견인의 은혜 없이는, 천성에 이를 수가 없다. 절대로 나 자신을 신뢰하지 말라. 
그리고 동시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옛사람을 벗겨내고, 새사람으로 덮혔다면, 어린아이의 탄생인 것이다. 너는 여전히 걷다가 넘어질 수 있으며, 넘어질 것이다. 넘어질 것을 염려하지 말라. 넘어지라는 얘기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 걸어라. 그분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진실된 만큼, 최선을 다해 걸어라. 언젠가 내가 자꾸 넘어지는 것을 넘어서 엎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음성이 생각난다 '그것은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넘어진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충성을 버리지 않는다. 갖은 눈물과 침을 코와 입으로 삼키면서 일어나 걷는다. 넘어질수록 사랑에 의해 안겨져 일어난다. 일어나는 것도 내 힘이 아닌데, 걷는 것은 오죽하랴?

그러므로 젊은이여, 네 눈과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행하되, 하나님이 장차 너를 심판하실 줄을 알라. 네가 진정 사랑과 충성을 바치며 걷기 위해 넘어졌는지, 넘어지기 위해 내달렸는지, 하나님은 "그 가장 깊은 심령의 무저갱"을 보신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무저갱의 심령이었으나, 거듭난 신자의 심령은 무저갱이 아니라 오히려 하얀 스케치북의 평지와 같다. 이때부터의 우리의 선택은 "성령의 보호" 안에 있기 때문에 심층적인 미지의 것이 아니라 진정 "나의 동기"가 어떠했는가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젊은이여, 무서운 것을 알고, 무서워하지 말고, 다시 아름답게 걷고, 넘어지지 말고, 넘어지고, 넘어진다면, 다시 일으켜 세우심을 받으라. 하나님이 다 아신다, 자, 어서 일어나 걸으라. 마음껏 걸으라. 마음껏 사랑하고 충성하라. 



가모가와의 여름 저녁, 2012 교토에서, 내 자전거 속에는 구겨진 지도와 캔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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