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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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선물의 여정

jo_nghyuk 2013. 2. 7. 12:06
길을 걷다 풋, 웃음이 나온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즐겨 하신다. 그분 자신이 숨는 것도 즐겨 하시고,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찾아 내는 것도 즐겨 하신다. 그는 우리의 삶에 참으로 많은, 다양한 선물들을 주셨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과 염려, 방어기제가 그러한 것들을 '받지 않는 안정권'으로 우리를 숨긴다. 나는 그러한 순간들마다 내 영혼에 어스름이 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받지 않고' '주지도 않는' 안정권에 나를 밀어넣을 수록, 내 지각은 매우 협소해진다. 
때로는 중간에 낄 때도 있는데, 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라는 우스꽝스러운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는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놓여지는 순간이 있다. 우리의 손은 경직되어서 움츠러져 있지만, 펴있지도 못하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은, 그리고 사랑의 초대와 갈망은, 우리가 먼저 받는 수용자의 위치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손을 활짝 피고, 마음을 열고, 감각을 개방하고, 자신의 갈망에 대해 너그러워져야 한다. 받는 선물 중에 물고기가 아닌 뱀이 있을까, 떡이 아닌 돌이 끼어 있지는 않을까, 사고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의심이며 경직일 뿐이다. 건강한 긴장이라고도 할 수 없다. '최소한 받는 이 순간'에서 말이다. 
나는 예배를 토대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사랑의 초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최초의 순간에 숨어 있다. 그러나 어스름 속에서 한쪽 발을 지긋이 빛으로 아이처럼 밀어넣는다. 아빠는 그것을 보고 흐뭇하게 키득거리며 웃고 있을 것이다. 숨바꼭질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이는 지각이 없다. 다만 받아야 하고, 인식해야 한다. 지각과 비판은 받은 후에 형성되는 것이지, 형성을 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손이 어중간하게 꼬부라진 채로, 우리는 받으려 하지만 하나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개방은,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개방은, 용기를 필요로 하고, 굉장한 모험을 필요로 하는데, 어쩌면 낭떠러지로 뛰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초대가 아빠로부터 올 때, 주저하지 말라. 받으라, 개방하라, 개방하라, 개방하라. 
내가 진정으로 회심을 경험하고 난 후에 초기에 받은 음성 중 하나는 '구하라'라는 것이었고, 하나님은 분명 내 내면의 가장 정직한, 첫번째의 갈망을 '구하라'고 도전하셨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도 세상적인 것으로 보였고, 너무도 예술적이었고, 너무도 재능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차마 구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구하라는 음성은 세 번씩이나 들려왔다. 패러다임의 전환을 위해 아버지는 세 번, 완벽하게 우리를 확증하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붙드신다. 나는 구하기 시작했고, 그 직후 일어난 일은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지금까지 그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흘러들어왔다가, 흘러나갔다'

나는 내 생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선물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재능이기도 하고, 관계이기도 하며, 사랑의 초대이기도 하며, 영적인 것이기도,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예술적이고, 손에 잡히고, 잡히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구원도 그리하지 않는가. 믿음을 우리는 논하지만, 구원은 선물로서 이루어졌고 우리는 수용자로서 손을 펴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은 수여자를 앞서는 믿음이 아니라 선행된 선물에 대한 수용의 자세이다. 

이 모든 선물은 흘러와서, 흘러나간다. 구원받은 이는 다른 이에게 구원의 기쁜 선물을 함께 나눌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많은 재능들, 선물들, 사랑들, 은혜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들어가 그들을 기쁘게 하고, 섬기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때 선물은 더욱 풍성해진다. 선물을 가둬두고 있는 이에게는 들어오는 통로가 점점 협소해질 수 밖에 없다. '들어오는 통로와 나가는 통로는 같다' 그리고 동시에 더 크고 넓게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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