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경직과 사랑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경직과 사랑

jo_nghyuk 2013. 2. 8. 11:26
우리는 죄를 이기고 싶어서, 의지를 사용한 나머지 경직이 될 때가 있다. 이때에 사용한 의지는 데이비드 베너가 지적하듯, "사랑을 앞선 의지"이며, 내 마음을 질식시키는 의지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한 위험의 도랑을 본다. 우리가 갈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제랄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정화된" 갈망이 아니라면, 갈망만을 주장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주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장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표현하듯이,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기대"이다. 내 뜻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고, 내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바램은 기대이다. 우리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풀어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풀어준다. 희망은 내가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믿는 신뢰이다. 이러한 희망으로 우리의 기대를 변화시킬 때, 우리의 갈망은 정화되어진다. 

나는 경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직은 두려움의 것이며, 죽음의 것에 속한다. 경직을 푸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 안의 자유함만이 경직을 풀어준다. 제랄드 메이는 뻗음과 움츠림에 대해 이야기한다. 뻗는다는 것은 무엇을 쥐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안의 가장 정직한 갈망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고 풀어주는 것이다. 이 풀어주는 것은 어떤 행동 양식으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 행동 양식으로 표현하더라도,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될 필요가 없다. 이 뻗음은 무엇을 향한 기대가 아니라, 희망의 뻗음이다. 그리고 뻗음 뒤에는 움츠림이 따라오게 된다. 이러한 스트레칭과 이완이 유연한 리듬을 타게 되면, 우리는 경직으로부터 자유한 동시에, 올바른 긴장과 이완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이 지적하지 않는 한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여전히 영적인 전쟁터 안에 우리는 놓여져 있고 "포위되어져" 있다. 영성의 추구가, 갈망의 추구가 위험성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키 포인트로 이동해갈수록, 원수는 그것을 교란시키기 위해, 혼미하게 하기 위해 방해공작을 펼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거점이 가장 치열한 교전장소이기도 한 것이다. 

순진하게 영성에서 답을 기대할 수도, 갈망의 풀어짐에서 마무리를 지을 수도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영적 씨름의 현장에 있고, 그 씨름은 우리의 육체 가운데에서 벌어진다. 
그러므로 초대 기독교는 계속해서 우상과 음행을 경고한다. 우리의 몸은 성령의 전이 될수도 있고, 우상의 신전이 될수도 있는 중간지대이며, 교전장소이다. 깨어 있지 않는다면, 영성을 추구하면서도, "영적으로는" 지고 있을 것이다. 
싸우지 않는 군사는 이미 패배한 것이다.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며, 나의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우선에 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선에 들어야 내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 하나님이 나의 최대의 갈망이 되어야 내 몸은 예배처가 된다. 정화되지 않은 갈망으로 내가 가득한 것은 이 예배처가 전쟁터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놀랄 것 없다. 그것이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어있지 않는다면, 그동안 누렸던 많은 영성과 자유함이, 소중한 무기들이 고스란히 우상에게 넘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내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지 않는 것도 나는 영적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참되지 못한, 잘못된 이기적인 사랑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가! 나는 내 스스로를 보며 타인에 대한 내 사랑이 얼마나 조건적이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만약 내가 타인을 사랑하는 조건들이 그 사람에게서 사라지게 된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여전히 그를 사랑할 것인가? 그러므로 이러한 아가페 사랑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랑은 이러한 사랑으로 점차 변화되어야 한다. 

나는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싶다. 
그리고 이웃을 정말 참되게, 무조건적으로, "예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말에 있지 않다. 나는 오늘도, 내일도 영적 전선의 한 가운데 놓여질 것이며, 원수로부터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경직되지 않으면서, 긴장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자유하면서도, 거룩할 수 있는가? 가능하다. 

하나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이웃을 참되게 사랑하는 것이 그 출발지점이다. 
사랑이 없는 영성이 가증하고, 인간성이 없는 영성이 매정하듯, "사랑만이" 답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참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하여야 하고,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 

나는 정말로 참되게, 사랑하고 싶다. 참되게 자유하고 싶으며, 참되게 깨어 있어서 생명을 지키고, 거룩함을 지키고, 하나님을 향한 순결을 지키고 싶다. 그리고 실수할 것이다. 앞으로도 실수가 있을 것이지만, 깨어 있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가 "포위당해 있을 때에도" 보호하심을 믿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나는 "똑바로 걷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