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몰트만의 <오시는 하나님>

jo_nghyuk 2013. 5. 30. 00:40

몰트만은 이 책, <오시는 하나님>을 통해 균형잡힌 종말론적 신앙을 제시한다. 특히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발생한 수없이 많은 이단과 사이비 단체가 있으며, 비단 이단이 아니더라도 한국교회 안에서 종말론에 대해서 목회자가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선포하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개개인의 현실을 도피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한 달 안에 읽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몰트만의 책은 그리 읽기 쉬운 책은 아니며 분량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몰트만의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의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참신한 신학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굉장히 균형잡힌 신학자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상당히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그러한 나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하나님은 미래에서 오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나라이며 하나님의 능력은 미래의 능력이다. 세계는 종말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종말은 미래에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종말이 미래에서 다가온다는 생각에만 경도되어질 때 인간은 현실에 대해 무감각해지며, 피안의 세계에 천착한 나머지 일그러져가는 현실을 더욱 방치하게 된다. 

그러나 몰트만은 그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오시는” 하나님의 능력,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미래적 능력으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고 “희망”의 능력으로 이 쓰레기같은 현실 속에서 쓰레기들을 치워가는 것이 진정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임을 역설하고 있다. 

미래의 종말은 분명히 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성령으로 이 미래적인 능력을 선취하였다.

T.S. 엘리엇이라는 시인을 나는 참 좋아한다. 그의 시 중에 “네 개의 사중주”라는 시의 표현에서처럼, “영원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더이상 운동하지 않는 한 점”이다. 

종말은 분명 시간의 흐름이 멈추며, 지속되는 개념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영원히 고정된 시간으로서, 그리고 새로워진 공간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진정 종말론적 삶을 사는 신앙인은 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말씀하셨듯, 과거와 미래가 한 점에서 모이고, “해결되는” 현재적인 삶을 사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성실성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의 속에 미래의 예표가 있고, 미래적 희망은 이 현실 속에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현실에 충실하게 살면서도, 현실의 죽음의 세력 앞에 함몰되지 않고, 미래의 피안으로 도피하지도 않으며, 과거가 더 나았다고 그리워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의 장 안에 있는 실존으로서 끊임없이 투쟁하며 산다는 것을, 그러므로 나는 깨닫게 되었다. 미래의 능력인 믿음, 사랑, 소망은 이 현실에서, 타협하지 않게 하고, 화해시키고, 기쁨으로 인내하며 밀고 나가게 신앙인을 돕는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미래의 사람”이고, 옛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다. 이 세계의 죽음의 능력은 우리를 끊임없이 미래를 향하는 (위를 향하는) 현실이 아니라 과거로 퇴행하는 (아래를 보게 하는) 현실로 절망케 하려 한다. 우리가 타협하고, 화해하지 않고, 슬퍼한다면, 우리는 계속 과거로 퇴행하는 옛 사람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것이 영적 전쟁의 패배가 아닐까. 

이 세계는 과거로 퇴행하려는 옛 사람과 미래의 능력을 끊임없이 성령 안에서 선취하며 선포하고 발휘하는 새 사람의 치열한 격전지이다. 또는 우리의 몸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몰트만의 표현대로, 우리가 미래로 나아간다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다. 왜냐하면, 현재적인 사람은 미래를 맞이할 뿐, 미래로 나아갈 능력이 없다. 우리는 다만 현실 안에서 계속해서 퇴행의 길로 나태하게 갈 것인지, 미래의 능력을 선취하는 성실성으로 살아갈지를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미래로 나아간다고 말한다면 그는 아마도 낙관적인 도덕주의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회심”은 미래로 향한다고 착각하는 도덕주의로부터, 미래의 능력을 선물받음으로 선취하는 신앙인으로 돌이키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인간의 영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 헬라적인 불멸의 영혼이 존재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자녀라 부르시고, 그 관계를 계속해서 “두려워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며 보존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는 생명을 계속해서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사망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 (롬 8:38-39)을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고 보존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계속해서 그 생명을 누리게 되고,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되는 것이다. (롬 8:37)

그래서 몰트만은 죽음의 본질을 무관계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기간 중 나는 나에게 장학금을 기탁해주신 권사님의 추도예배에 가게 되었다. 그분은 돌아가셨고, 한번도 그분을 뵌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산 자가 관계 안에 있을 수 있음을 예배 가운데 느낄 수 있었다. 몸의 죽음은 관계를 끊지 못한다. 오히려 우리가 타자에 대해 무관심하며,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몰트만이 책의 후반부에서 핵의 위협에 대해 말하면서, 1945년 히로시마 사건 이후 우리 인류의 삶이 한정된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묵시사상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인간이 인간에게 종언을 고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위협 속에 언제나 시간의 유예 속에 살고 있다는 말이 맞다. 협박자는 피협박자가 되고, 관계는 이 죽음의 사슬 속에 얽혀버렸다. 각자의 관계는 죽음을 담보로 불안의 나선을 이루어가고 있다. 현 한국 정세처럼,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다만 우리만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핵의 위협에는 죽음의 사슬이 얽혀 있다. 타자의 죽음 뿐 아니라, 전체의 공멸의 나선이 얽혀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북한의 전쟁의 위협에 대한 것을 단순히 타자에 대한 위협으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은 죽음의 관계의 사슬에 얽혀 있다. 어쩌면 전세계가 그러하다. 많은 이들은 단순히 북한과 분리된 상태를 유지하며 “배제하는” 것이 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 배제가 바로 죽음의 원리라는 것을, 그리고 오히려 더 깊은 죽음의 사슬로 얽히는 것임을 모르고 있다. 


몰트만은 단순히 개인의 경건 문제에, 사변적인 신학에 천착하지 않는 신학자이다. 그는 사회 문제, 국제 문제, 생태 문제 등 여러 이슈에 대해 신학자로서 보다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 공헌하는 신학자이다. 신학 또한 여러 이슈들에 대한 관계 안에 놓여져 있을 때 세계에 대해 공헌의 기여를 해줄 수 있다. 

또한 몰트만은 인간 자체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무기력함을 역설하는 신학자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기에 “오시는 하나님”과 “성령의 미래적 능력”은 언제 세계가 끝나버릴지 모르는 이 세계 가운데 중요한 해법을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인간에 대한 관계이다. 그리고 성령은 관계의 영이다. 하나님이 사람과, 그리고 세계와 관계하신다는 말은 여전히 생명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이 사실을 죽음의 원리의 사슬에 얽혀있는 세계에 대해, 한국의 현실에 대해, 교회의 이슈들에 대해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희망으로 일해야 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나의 삶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속에서 그리고 그의 자비의 능력 속에서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고, 시작된 것을 끝내며, 미루어진 일들을 처리하고, 잘못을 용서하며, 상처를 고치고, 행복의 순간들을 모으며,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214쪽) 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새겨본다. 우리는 “선취”한 후에, 다시 현실로,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죽음의 쓰레기들을 치우고, 다시 한번 생명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몰트만은 천년왕국적 종말론을 말하면서, 그 자체로서의 천년왕국론이 역사의 재난들로 인도한다고 했다. 그러나 종말론과 결합될 때, 그것은 살아남음과 저항에 대한 힘을 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살아남음과 저항은, 가난한 곳에서, 주변화된 지역에서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애통하는 이들, 가난한 이들, 주린 이들로부터 시작된다. 현실적으로 아프리카와 동남아와 같은 가난하고 소외된 곳 뿐 아니라, 진정 자신이 “가난하고 주린 것”을 깨닫는 모든 지점에서 이 살아남음과 저항의 싸움은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고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는 시공간에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고난과 함께 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통과한 그리스도에게서 부활이 있었던 것처럼, 가난한 편에, 주린 편에, 애통하는 편에 서는 이들은 이 세계의 고난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연대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연대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못하는 고통의 장소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그 연대의 장소에서, “관계”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생명이 죽음에 대항해 드러날 것이고, 생명을 삼키고 승리하게 될 것이다. 


몰트만은 “생동한다”는 개념을 참 좋아한다. 그리고 그 생동은 성령의 능력으로서의 활력을 드러낸다. 죽음은 우리를 억압의 힘으로 죽이고 생동력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자에 대해 무감각하게 하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선입관을 가지고 우리를 폐쇄시키고, 유페시킨다고 몰트만은 말한다. 


내가 해야 할 목회란, 어쩌면 타자를 생동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 

타자에 대한 무감각이 아니라, 타자와 연대함으로, 그와 관계함으로 죽음의 상황에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고, “하나님이 당신과 관계하신다. 아무도 그 관계를 끊을 수 없고, 가장 깊은 죽음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과 함께 하신다”라고 선포하며, 위로하고, 신원해주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그 연대에 들어가기 위해선, 내가 그 고난의 자리로의 초대에 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목회라는 것은 함께 고난받고 울면서 “관계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그들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들어갈수록, 그들에게 생명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성령이 내 안에 있는 것처럼, 인격과 인격이 교통할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그들의 죽음의 사슬을 끊고, 그들의 상황과 환경을 “표면적으로” 바꾸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 그들의 상황과 환경에 쌓인 죽음의 쓰레기들을 하나님과 함께 “치워나가는 것”이 오히려 목회자가 해야 하는 건강한 목회가 아닐까.


단순히 강단에서, 당신의 삶이 바뀔 것이고, 하나님이 당신의 상황과 환경을 바꿔주실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복주의적인 설교이며, 그렇게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 않아 성도를 실족시키는 목회라는 생각이 <오시는 하나님>을 읽으며 들게 되었다. 

오히려 나는, 목회자로서 성도에게 “생명이신 하나님은 당신과 지금도 관계하고 있으며, 그 죽음의 현실 앞에 고꾸라진 당신 안에서 함께 고난을 겪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죽음을 맛본 예수가 부활했던 것처럼, 오직 그 죽음과 같은 고난의 환경 안에서 성령의 부활의 능력이 당신의 삶에 역사할 것입니다. 그 능력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끊을 수 없는 관계에서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우리의 믿음을 통해 사랑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할 것이며, 우리는 그렇기에 희망을 가지고 이 죽음의 현실을 점진적으로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우리 함께 이겨봅시다. 함께 승리합시다” 라고 위로하며, 그의 눈물에 함께 울고, 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며, 그의 고난 속에서 함께 중보하며, 하나님께서 이러한 연대의 관계 속에서, 성도의 교통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증거하는 목회를 하고 싶다는 소망을 <오시는 하나님>을 읽으며 가지게 된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관계하여,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이 우리에게도 역사하듯이, 성도의 고난과 슬픔에 대해 관계하고, 연대하는 목회자만이 그의 죽음의 상황 속에서 함께 부활의 능력과 희망의 미래의 삶을 선취하며 싸우고 이길 것이라고 믿는다. 목회자가 있는 것은, 단순한 선포만이 아니라, 성도와 “연대함”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을 함께 맛보게 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생명은 관계이며, 성령의 능력은 “함께 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 함께 하시기에 미래에도 오시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