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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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오랑쥬 껍질을 씹는다는 것

jo_nghyuk 2013. 10. 26. 17:32
암스테르담에는 시립도서관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물 위에 떠있는 모던한 도서관이고 또 하나는 길 모퉁이에 쑥스럽게 박힌 자그마한 도서관이다. 작은 도서관을 나는 사랑했는데, 8층의 카페테리아와 1층의 피아노를 품은 애플스토어같은 도서관보다, 오래되어 밟으면 삐걱대는 나무계단과 칠이 벗겨진 나무바닥, 카페라고는 1층에 있는 둘중에 하나는 고장난 커피자판기 뿐인 이 도서관을 자주 찾았다. 2층 마루바닥에 앉아 에밀리 디킨슨 등을 읽으며 아이팟을 듣곤 했다. 2층의 어떤 작은 방에는 앤티크한 소파와 그림 액자, 꽃병이 놓여진 테이블만이 있었다. 그 방은 혼자 있기에 적절하게 소박하고 호화로운 공간이었고, 한명 이상이 들어가면 어색해지는 그런 곳이었다. 이 방에서 제인 오스틴이나 버지니아 울프를 읽곤 했던 것 같다. 조용한 재즈 트리오 음악을 주로 들었고, 제목에 오렌지가 있는 넘버를 자주 들었다. 

그 곡을 들을 때마다 나는 정지용에게 송구스러운 기분이 든다. 교토의 가모가와에서 그는 오렌지 껍질을 씹는 나그네의 시름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렌지 껍질을 정말로 씹었을까, 라는 궁금증은 그다지 들지 않는다. 그보다 시에서 굳이 오랑쥬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랑쥬, 나그네, 시름, 이 단어들을 입에서 중얼거리면 이상하게도 오랑캐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었다. 오랑캐, 외래의, 이국적인 불안과 공포, 형체가 없어서 우주적인 감정을 환기시키는 어떤 막막함. 
 
제국의 중심부에서 주변화된 자로서 세계를 접하는 기분은 광막하고 아름다운 모순된 우주 앞에서 느끼는 초라한 시름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용은 다분히 관상적인 시인이었다. 
화가들 사이에서 광기의 언덕이라고 하는 순간, 표층적이고 피상적인 고속의 허무에서 풀려나 참으로 느리게 세계의 감각들을 향유하며 자신의 감각이 하나 하나 새로운 자극들로 인해 의식이 깨어나는 순간을 그는 포착하여 언어를 조탁해갔다. 

그는 차라리 육지로 나오는 바다표범과 같다. 폭주하듯 범람하는 감각들에서 기의적 심층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는 호화로운 세계에 대한 소박한 관상가였다. 그것은 그의 실존이기도 했지만, 그는 한계 안에서의 자족하는 초월을 배울줄 알았다. 

교토에서 그는 오랑쥬의 껍질만을, 떫은 표층만을 씹고 있다. 단단하게 내부로 뭉친 오랑쥬는 껍질을 씹는 주변인에게 조금의 알갱이도 허락하지 않는다. 

가모가와 노료유카에서 여름을 즐기는 인파 밑으로 강변에 앉아 캔커피의 남은 몇방울을 흡입하기 위해 캔에 입을 가져갔다. 철 내음이 났다. 
빈 그릇을 끊임없이 핥는 개의 혀는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빈 그릇의 맛을 안다는 점에서 귀하다. 캔커피의 철 내음의 맛을 알고, 오랑쥬 껍질을 씹는 맛을 아는 것은 귀하다. 카페도, 피아노도 없지만 커피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페인트가 벗겨진 삐걱대는 마룻바닥에 앉아 책을 읽으며 마음이 고요해질수 있는 것은 귀하다. 애플스토어와 같은 모던하고 편리함이 이곳에는 없다. 책도 없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럼에도 그 없는 중에 제인과 버지니아, 에밀리를 만날수 있는 것은 귀하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아서 그 도서관은 나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작고 소탈한 액자가 걸려있고, 꽃병이 있는 그 방은 내 방이 될 수 있었다. 오랑쥬 알갱이 맛은 잘 모르지만 껍질만 씹는 오랑캐의 마음은 잘 알수있다. 노료유카를 즐기는 기분은 모르지만, 강변에 혼자 앉아있는 사람의 기분은 잘 안다. 오랑쥬 껍질을 씹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 시름을 앓아본 사람은 나그네들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점에서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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