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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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자와 무소유자의 정초와 항해

jo_nghyuk 2014. 2. 11.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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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술에서 암스테르담을 언급하며 알랭 드 보통은  a 뒤에 a가 연이어 붙는 aa 의 이국성에 대해 호기심어린 어조로 이야기한다. 영어 교육을 받아온 한국인으로서 나에게는 독일어의 ei의 발음이 그러한 느낌을 주는데, ‘에이’라고 발음해야 할 것 같은데 ‘아이’라고 발음하는 순간, 음절들이 케미스트리를 이루는 일반적인 방향에 역회전이 걸린듯한 새로운 감각으로서의 쾌감이 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네덜란드에서는 i 다음에 j가 오게 될때 기묘하게 미끄러지며 ‘얘이’와 ‘예이’ 혹은 희뿌연 ‘야이’의 그물망 사이의 어딘가에 그 발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나에게는 그 발음이 이렇게 복잡다단한 모호성의 긴장의 역학으로 다가오지만, 정작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냥 ij로서의 명료한 지점을 믿고 산다는 것이다. 그 언어를 소유하지 않은 자에게 오히려 더 기묘한 구조적 층위가 보이는 것이고, 이미 소유한 자에게는 그저 새가 날듯이 당연한 한 지점의 감각이 키보드 위의 버튼처럼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점유하고 있다. 마치 한국어 설정이 되어있는 맥북으로 ü를 타이핑하기 위해서 u를 길게 누르고 여러 다른 기호들의 가능성 속에서 움라우트를 찾아 결합하는 것과 다르게, 그냥 독일의 키보드에는 보란듯이 ü의 자리가 키보드 오른쪽 p의 자판 옆에 하나 더 할당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2

그렇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한 사람이 정초해있는 명료한 관점과, 그것이 결여되어 있는 사람이 정초’해가는’ 과정의 모호성의 관점이 갈라질 수 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바야흐로 세계의 사유가 다원성 안의 논의를 해오며 이 모호성이라는 것에 대한 담론을 회피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체화의 개념이 강한 모호성 뿐 아니라, 이미 자신의 지각판이 함유하고 있어서 정초되어버린 명료성이라는, 전통 혹은 도그마 아니 오히려 그것들이 자신들을 넘어 지향하는 ‘저’ 절대성에 대해서도 사유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어떤이가 자신의 고향을 버린다면, 이제부터 표류하거나, 혹은 새롭게 정초하길 원하는 다른 본적을 찾아야만 하는 숙명적인 실존을 맞닥뜨려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정초하기 원하는 사람이야말로 더욱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더욱 슬프고 쓸쓸해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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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계시와 일반계시, 혹은 은총을 말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 명료함과 모호함 도식의 사유를 적용할 수는 없을까?

그것은 어쩌면 건강해지느냐,와 풍요로워지느냐, 사이의 간극과 긴장이기도 하다. 친교는 언제나 위험천만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타자를 늑대로만 여길 것인가? (혹은 늑대를 개를 대하듯이 다가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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