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영점(zero point)으로부터의 부활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영점(zero point)으로부터의 부활

jo_nghyuk 2013. 12. 14. 18:23

로마서 4:13-25

“영점(Zero point)으로부터의 부활”


(1)


“건너오라” 


예수님의 음성이 캄캄한 밤, 호수 위에 들려왔습니다. 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분의 음성에 의지해서, 배 밖으로 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내딛은 발 밑에는 일렁이는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자는 마치 단단한 젤리 위를 걷는 것처럼 물 위를 늠름하게 예수님을 향해서 걸어가고 있습니다. 

밤이 어둡고 캄캄해서 하늘과 호수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런 것은 남자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은 그 남자를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2)


며칠 뒤, 황제 가이사만을 숭배하는 도시인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제자들은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나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며칠 전 물 위를 담대하게 걷던 그 남자가 이번에도 담대하게 나섰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듣고 그를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다. 너는 반석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리고 천국 열쇠를 너에게 주겠다.”


(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별안간 낯설고 기괴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을 뿐 아니라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사흘째 되는 날 살아날 것이다.”


(4)


남자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걷고 있던 물 위로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견딜만한 바람이 아니라 거센 파도를 일으키는 큰 풍랑이었습니다. 믿음으로 견고하게 서 있던 물이 젤리처럼 톡 톡 약하게 터질 것만 같았습니다.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에서 남자는 물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남자를 붙잡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둘은 아직도 풍랑이 거세게 이는 물 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잡아주고 계신 덕분에 남자는 여전히 자신이 물 위에 서 있음을 보았습니다. 

배 위로 오르자 풍랑이 그쳤습니다.

아니, 배 위에 오를 때까지 풍랑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5)


“주여! 그리 마옵소서! 그 일이 결코 주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잖아요!” 

그리고 남자는 다시 한번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구나.”

(6)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점점 믿음의 진보를 보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배에서 물 위로 걸었던 그 사건은, 베드로로 하여금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물’이라고 하는 것은 성서전통에 있어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의 시작인 창세기는 그 시작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셨다 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수면은 물을 상징하는 ‘테홈’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테홈’이라는 말은 고대 근동 세계관, 특별히 바벨론 신화에 나오는 혼돈의 괴물인 ‘티아맛’에 대한 신화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단어를 차용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테홈이 혼돈의 괴물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고, 혼돈하고 공허한 그 땅 위를 다니셨다는 것은 이사야서  45:6이 말하는 “나는 하나님이며 다른 이는 없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구원을 만들고 재앙도 창조한다” 라는 하나님이 그 혼돈까지도 다스리신다. 라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은 “오직 하나님 한분 만이 하나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혼돈과 불예측성, 재앙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제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지으시고 그 위에 계시는 분이시다. 라는 고백이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물과 물을 나누는 하나님의 사역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물이라고 하는 테홈, 혼돈의 괴물, 원수를 정복하는 신화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테홈이라고 하는 물은 노아의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리는 혼돈의 심판이 됩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 안에서 믿음으로 그 혼돈의 물의 수면 위를 끊임없이 하나님과 함께 운행합니다. 물은, 믿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방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구원의 세례이지만,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멸망시키는 혼돈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 사건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물과 물이 나뉘는 사건을 기억합니다. 홍해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모세라는 중보자를 통해 이미 그 물과 물이 갈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물을 정복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믿음을 요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의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은 것은 모세이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출애굽 사건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기적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7)


베드로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이스라엘 사람, 유대인으로서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그 또한 물을 정복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며, 수면 위로 운행하는 하나님의 영처럼, 물 위에 서있는 예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신다면, 나 또한 ‘믿음의 방주’가 되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래서 걸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기적을 그가 믿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요청했습니다. “주여 만약 주님이시면 저를 명하사 물 위로 오사 말하소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보증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불리우는 창조 사역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신화를 빌려오면서까지 물의 괴물, 혼돈의 괴물 테홈의 이야기를 창세기에서 상상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둘러싼 모든 원수들과 모든 환경들을 대적하여 승리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8)


오늘 로마서 4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던 믿음과 비교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7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사람들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의 성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없는 중에서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시다! 라는 고백을 바울은 아브라함의 사건을 통해 말합니다. 


그것은 무슨 사건입니까? 아브라함이 백 세가 되어 자신이 아들을 낳을 능력이 없고, 사라의 태가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가 하겠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 사건입니다. 


18절을 보면 이렇게 아브라함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우리가 확률을 말함에 있어서, 0퍼센트라고 할 때는 정말 어떻게 해도 모든 가능성이 없을 때 가능성이 제로이다. 라는 의미로 0퍼센트를 말합니다. 


9.11 사건이 있던 월드트레이드센터 장소를 지금 미국인들은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라고 말합니다. 그라운드 제로는 원래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을 말하는 용어로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의 폭발지점을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그라운드 제로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핵무기가 떨어지고 나면, 폭탄이 터지고 나면, 그 그라운드 제로 일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방사능 때문에 생명체에 대한 기대감도 그 땅에서만큼은 제로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말하는 아브라함의 상태는 바로 이 그라운드 제로의 상태입니다. 과학자들은 우주의 종말을 ‘영점’으로 비유합니다. 우주는 결국 팽창하다가 소멸할 것이다. 모든 것이 소멸되는 상태가 바로 ‘영점’이다. 라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빌려와서 인간의 구원에 대해 말하는 상태는 바로 이 ‘영점’의 상태입니다. ‘그라운드 제로’의 상태입니다. 우리로부터 구원을,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 확률은 단지 ‘0’이다. 라는 것입니다.


(9)


담대하게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테홈’과도 같은 예측불가능한 혼돈의 적을 만납니다. 호수 위의 베드로에게 그것은 바람이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어지간한 바람에 베드로가 요동했을까요? 그처럼 담대한 용기있는 사람이 요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 바람은, 거센 파도를 일으키고 베드로를 휘청거리게 하고, 넘어뜨리게 하는 바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예측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아니 기대하기 싫었던 고난이었습니다. ‘저것만 없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바로 그러한 사건과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가장 싫어하는 그 바람이 지금 베드로를 물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분명 믿음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출발한 그 믿음을 ‘영점’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 앞에서 베드로의 믿음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저 좀 구원해주세요!”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외치는 빵점짜리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다가와 손을 내미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함게 오르자 바람이 그치고, 제자들이 진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풍랑이 그쳤기 때문입니다. 물 위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반으로 가르셨기 때문에,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떠들썩하게 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라고 찬양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들은 본 것을 가지고 믿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러했습니다.



(10)


그리고 며칠 뒤에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진보된 신앙을 예수님 앞에 보입니다.

며칠 전 영점이 되었던 신앙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진정 살아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라는 것을 뼈져리게 배웠습니다. 


그리고 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례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처럼 선지자로밖에 보이지 않느냐?’ 라고 질문하실 때 베드로는 한층 성숙해진 신앙으로 예수님 앞에 나가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능력있는 선지자가 아니라,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참 아들,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쯤 고백하고 나니, 제자들도 놀라고, 예수님도 놀라고, 큰 칭찬을 받습니다. 큰 직분도 받았습니다.

물 위를 걷다가 빠져버린 젤리같은 베드로가, 예수님은 단단한 반석이라고 하십니다. 교회를 여기 위에 세우겠다고 하시고, 천국 열쇠까지 준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합니다. ‘이제 이 정도가 된 건가?’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헛소리를 하십니다.

자기가 글쎄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이 수난이야기, 아니 수난이 끝이 아니라, 죽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핵폭탄과도 같이 베드로의 머리 바로 위에서 터집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났습니다. 아니 가루도 찾아볼 수 없게 터졌습니다.

다시 빵점입니다. 다시 그라운드 제로입니다. 모든 소망이 다 박살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겪어본 풍랑 중에 가장 큰 풍랑입니다. 가장 큰 파도입니다. 가장 큰 ‘테홈’입니다. 

가장 큰 혼돈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그 테홈 속에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변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책망 중에 가장 큰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은 너 자신이다. 테홈은 너 자신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할 수록, 너 자신이 테홈이 되어간다. 나를 위해 죽는 자는 살 것이고, 자신을 위해 사는 자는 죽을 것이다.”


(11)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위해 죽는 자는 다시 살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살고자 하는,  죽지 못하는 자는 죽을 것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상황이 죽음이고, 넘치는 물의 혼돈인 것을, 영점이며, 그라운드 제로와 같이 핵폭탄이 떨어진 뒤의 상황인 것을 알고도, ‘믿음이 없어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오히려 확신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내 상황과 환경이 영점일 때,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불러내어 살아내게 하시는 분임을’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움입니다.



(12)


우리가 예배 시작에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원래 “나는 믿습니다” 라는 Credo라는 라틴어로 시작합니다.

칼 바르트라고 하는 신학자는 신앙은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믿기로 결단한다. 그 결단은 내가 믿는 것의 존재에 대한 반대를 극복하는 결단이고, 불신앙에 대한 배제의 결단이 됩니다. ‘나는 믿기로 결단한다’ 는 것은 매우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믿음에 진지함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 결단을 내린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혼돈과 같은 물 위에서 ‘오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태초에 ‘물이 갈라지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힘찬 음성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수난과 죽음을 당한 뒤에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에 의존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것, 그것이 “나는 믿습니다”의 믿음의 결단입니다. 


이것은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 자신의 계시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그러한 자유로운 결정에 대하여 우리의 결정으로 복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신경이 “나는 믿습니다”로 시작하는 이유는, 초대 교부 안셀름이 말한 것처럼, “나는 이해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신앙고백 때문입니다. 때로 우리 편에서 이해되지 않는 ‘테홈’과 같은 세력들이 베드로의 눈 앞에서처럼 우리에게도 일어나,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을 뒤흔들고, 핵폭탄을 떨어뜨려 우리가 보는 것에 대해 ‘그라운드 제로’의 황폐한 상태로 바꾸어버릴 때에조차 ‘죽은 상태와 같은 아브라함’이 믿었던 그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하여 우리의 결정으로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베드로와 같이 핵폭탄이 떨어지는 것 같은 상황, 그라운드 제로가 되는 상황에서 예수를 붙들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지 않으면,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으면, 다시 살 수 없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욱 치열하게 붙들고 씨름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불가능성 가운데에 하나님이 가능성의 씨앗을 주셨듯이, 그 천사는 엘리사벳의 남편 사가랴에게도 찾아갔습니다. 그 역시 나이가 많아 죽은 것 같은 때에 천사가 세례 요한을 엘리사벳이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 천사는 처녀 마리아에게도 찾아가서 동일한 역사로 그리스도를 잉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라는 믿음으로 응답하였고, 사가랴는 믿지 않으므로 천사가 그 입을 당분간 벙어리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우리에게 도전되는 문제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자유로운 결정에 대해 우리에게 ‘믿음의 결정’으로 순종하길 원하시며 다가오십니다. 

거기에 대해 우리는 ‘주의 여종이오니, 주의 무익한 종이오니’ 하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여, 절대로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하리이다’ 라는 고백으로 베드로와 같이 나의 생각의 주권을 행사하려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항변한 것이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매고 푸는 천국열쇠를 주었다고 말씀하신 직후라는 것을 상기해보십시오. 그리스도가 그를 사탄이라고까지 통렬하게 책망한 것은, 베드로가 그에게 주신 직분을 ‘인간의 일’대로 맞추어 생각하는 은밀한 도둑질을 은연중에 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3)


그래서 태가 죽은 것 같은 아브라함에서처럼, 사가랴와 마리아에서처럼, 세번 파산하여 완전히 그라운드 제로가 되었던 베드로에서처럼,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 은총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영점에서 하나님의 부활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새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 은총입니다. 만약 우리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우리의 어떠함을 보태서 하나님이 사역을 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이 아니라, 인간 편에서의 공로가 섞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나의 어떠함을 보고, 나의 상황의 어떠함을 보고,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이 시작될 수 없다는 의심을 버리십시오. 그것은 은밀하게 인간의 공로를 염두에 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사역은 칠흑과 같은 어둠이 오고, 그라운드 제로가 되고, 영점이 된 후에도 시작합니다. 우리의 의는 ‘예수가 우리의 범죄함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심’을 믿는 의입니다. 우리의 의는 우리가 완전히,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영점인 우리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시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을 믿는 아브라함의 의입니다. 


(14)


그러므로, 자신의 어떠함 떄문에, 혹은 상황의 어떠함 때문에 낙심함으로 이 대림절 3번째 주를 어둠 가운데 맞이하고 있는 성도가 있다면, 자신의 영점으로 낙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영점으로, 상황의 영점으로 낙심하는 것은 바람을 보고 물에 빠져가는 의심하는 베드로와 같고, 자신의 무능함을 보고 하나님의 새 사역을 의심하는 사가랴와 같습니다. 


왜 로마서 4장의 믿음을 말한 후에 로마서 5장에서 이어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가 40년이나 지속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끊긴지 400년이나 지속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은 있는데 나의 변화가 너무 더디고 심지어 없어 보여서, 사람들이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서는 것이 바람을 멈추게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서는 것은 바람을 부르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믿음으로 물 위에 서자 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풍랑은 예수님의 손을 잡고 배 안으로 들어가기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편지를 받는 로마서 성도들도 믿음 위에 서있는데도 환난이 지속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무척이나 괴로워했습니다. 환난이라 부르는 헬라어 단어는 ‘누르다’라는 들립보에서 파생된 들립시스라는 말입니다. 압착기로 눌러서 온 몸이 으깨지는 것 같은 가혹한 고통을 그들은 환난이라고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상황 가운데 억눌려 계신 성도 여러분들, 조금 더 기다립시다. 이 환난 중에 인내를 가지고, 이 환난의 바람이 우리를 연단하는 것을 참을 수 있는 것은 ‘소망’ 하나 뿐입니다. 그 소망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신다는 소망입니다. 

그리스도가 당장 내 삶에 나타나서 내 상황을 싹 바꿔 주신다고 초대 교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환난이 자신들을 연단하는 것을 인내로 보면서 그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만을 소망했습니다. 그들은 문제를 극복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문제와 함께 거하는 법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살아낼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그 영점의 상황에서도 ‘새 일’을 행하실 것을 믿었고, 동시에 자신들이 기대하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주여 그렇게 되지 아니하리이다’라는 베드로의 자기주장의 방식이 아니라, ‘주의 여종이니 뜻대로 이루어지리이다’라는 처녀였던 마리아의 권리 포기와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내맡기는 하나님 주권의 믿음, 영점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15)


그러므로, 대림절을 보낸다는 것은, 다시 우리가 영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됐고, 어쨌든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의 안일한 신앙이 아닙니다. 

영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삶을 영점으로 만드신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새 일을 이루시기 위한 내 삶의 전초 작업임을 믿는다’는 우리의 삶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의 첫번째 뜻은 ‘대재앙의 중심’이지만, 두번째 뜻은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영점으로 돌아갈 때, 우리가 생각하는 이 대재앙과 같은 상황과 환경의 환난과 고통이, 십자가를 지고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새로운 시작으로 시작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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