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기름진 얼굴이 아니라 피흘리는 발을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기름진 얼굴이 아니라 피흘리는 발을

jo_nghyuk 2019. 3. 19. 05:16
"여러분은 이 세대에 순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스스로를 변화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여러분이 무엇이 하나님의 의도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선함인지,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하는 것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온전함인지 판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히스기야의 타락은 풍성함에서 비롯되었다. 풍성함은 히스기야에게 축복이 아니라 독이 되었다. 삶에서 스스로 허리띠를 매지 않을때, 온갖 세상의 것이 흘러들어와 그의 정신을 혼탁하게 한다. 그래서 로마서는 „정신"을 새롭게 하라고 한다. 이성은 우리 삶의 키와도 같다. 언어와 의미가 거하는 곳이 우리 삶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방향타를 바르게 하는 자는 생각과 혀를 통제하는 자이다.  
지금의 세대는 건전한 이성보다는, 풍성한 감성을 추구하는 세대이다. 그러나 욕망은 무한하다는 것이 프로이트가 말한 욕망의 경제학이다. 욕망의 층위에 머물러 있는 자는, 결코 그 힘의 충동을 벗어날 수 없다. 헤겔이 말하듯 새로운 층위로 고양시켜야 한다.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전의 것들을 버려야 한다. 정말 버려야, 자유할 수 있다.
로마서는 우리의 정신을 새롭게 하여서, „변화를 받으라"라고 하는 수동태를 사용해서 말한다. 그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주께서 우리를 변화해가신다. 그러나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우리 자신을 세팅하고 조율하는 것은 우리의 정신, 즉 이성이다. 로마서의 ‚누스’를 마음이 아니라 이성으로 번역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 가는대로 사는 사람이 마음을 새롭게 할수는 없다. 이렇든 저렇든, 사람의 중추는 정신이고, 정직한 사람은 정직한 첩경으로 행한다. 
신앙함은 그래서 더하기보다, 빼기에 가깝다. 히스기야의 교만함은 무언가를 자기 삶에 더할 때에 일어난다. 하나님이 그에게 물질적 복과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주었을 때, 심지어 그의 삶의 연수를 15년을 더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다음 세대를 걱정하기는 커녕, 저주가 자신의 세대에만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썩어빠진 마음으로까지 타락했다. 여기에 히스기야의 한계가 있다.물질로부터, 영광으로부터, 권세로부터, 정욕으로부터 자유한 사람이 참으로 그것들을 다스릴 수 있다. 자유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지양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참으로 버려야 한다. 어렵고 쉽고는 문제가 아니다. 분명한 것은 Du kannst, weil du sollst라는 정언명제이다. 

나는 이 세대의 많은 선배들이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하지만, 왜 삶이 무기력하며, 영향력이 없을까를 의아해했던 적이 있다.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기이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벽에 못박고 그를 존경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없다. 복음은 sweetest frame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고, 대가지불임을 명심하라. 하나님이 주신 풍성함으로, 자유로, 재능으로, 권세로, 즐거움으로 너는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다. 십자가의 경제학은 모든 것의 포기를 요구한다. 아니, 바라지 않는 자에게 십자가는 요구하지 않고 묻는다. '너는 참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십자가는 다만 묻는다. 내가 대답하지 않으면 십자가는 멀어져 다시 벽에 박히고 그리스도는 존경의 객체가 될 뿐, 결코 나와 사랑을 나누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아버지보다 가까운 것이 남편이고, 남편보다 가까운 것이 친구라고 하는 표상이다. 하나님이 아버지일 때 우리는 어리광부리는 자녀됨을 누린다. 아버지와 자녀의 격차를 보라. 하나님이 남편 될 때에 우리는 연약한 그릇의 아내가 된다. 남편과 아내의 격차를 보라. 그러나, 하나님이 친구가 될 때에 여기에 무슨 격차가 있는가?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남편 되심을 누린다. 그러나 친구가 되고자 발 벗고 나서기를 망설인다. 왜인가? 사랑은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하는데, 사랑하지 않으니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포기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신이 된다. 우상은 그렇게 우리 삶에 조용히 깃들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곤 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더 이상은 그런 사랑을 하고 싶지 않다. 사랑을 받기만 원하고,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가시 면류관과 십자가를 쓰셨는데, 왜 우리는 가시밭길에서 그를 찾지 않고 꽃길에서 그를 찾는 것이며, 잠시 잠깐의 고난도 인내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냐.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할까. 찾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찾고, 찾고, 찾고, 찾고, 찾고, 찾고, 찾고, 찾고, 찾으라, 그러면 만날 것이다. 그는 말하신다.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고, 기도하라, 그러면 나를 만날 것이다.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고, 인내하라, 네가 믿는 십자가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세상에 보여주어라. 

나는 입술만 찰싹거리는 신앙이 싫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되게 하나님을 갈망하고, 인내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갈망한다고 말하는 사람 말고, 정말 인내하는 사람을 내게 달라. 나 혼자서는 넘어지니, 순금과도 같은 사람들을 내게 달라. 단 한두명이라도 내게 달라. 나는 오늘 그 기도의 응답을 보았다. 연약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싸울 의지가 있는 사람, 군사로서 함께 싸울 사람이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필요없다. 나는 그리스도를 미친듯이 갈망하는 친구들을 원한다. 오오, 나는 맛보고야 말았다. 모든 것을 다 바치고, 내 모든 것을 바치고 바칠 때, 내 앞에 인자와 위엄으로 서계신 그리스도의 임재를. 다른 것과 바꿀 수가 없다. 환난아 시험아 고통아 오너라, 나는 너희들을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수단으로 기어이 사용하고야 말 것이다. 고통 때문에 도망가는 패잔병이 아니라, 고통을 안고 그에게 나아갈 것이다. 안다, 나도 안다. 몇 번이고 넘어질 것임을. 그러나 나는 기어이 해낼 것이다. 나의 어떠함이 아니라 주의 은혜와 성령으로 나는 기어이 해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의지를 그분께 드리지 않으면 그분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지렁이처럼 느릴지언정 뱀처럼 교활한 자는 되고 싶지 않다. 

미안한 말이지만, 히스기야 정도의 영성으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이런 어중간한 사랑으로, 이런 미지근한 마음으로 은혜, 은혜 운운하기 보단, 차라리 숨어 계시는 하나님께 당신 좀 보여달라고 부르짖으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닐까? 주여,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은혜가 아닙니다. 당신이 내게 주시는 은혜를 나는 필요로 합니다.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내가 당신을 포기하지 않고, 당신만을 갈구할 때, 당신만을 내게 주소서.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정직함과 정직함과 정직함으로 당신만을 구할 때 당신만을 내게 주소서. 이전의 실수와 죄악과 타협을 다 뒤로 하고 당신만을 구할 때, 당신만을 내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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