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나에게 건네는 최초의 눈물의 악수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나에게 건네는 최초의 눈물의 악수

jo_nghyuk 2019. 3. 21. 22:46

벌써 봄이다. 강아지처럼, 또는 두렴없는 어린이처럼 봄은 나에게 성큼, 다가와 품에 안긴다. 봄에 대한 기다림은 참 길었는데, 봄이 성큼, 다가오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벙벙하기도 하다. 도서관 홀에 앉아 조용히 신문을 보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은 참 재미있다.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아 시간이 정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착시가 일어나기도 한다.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저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신문이나 책을 읽는 것이 삶의 습관으로 견실히 자리잡힌 것이리라. 바이마르에 이사오고 난 후에 같은 도서관, 같은 산책, 같은 연구의 리듬이 반복될수록 단정한 만족감을 느낀다.

도서관에는 내가 사랑하는 드가의 화집에서부터 존경해 마지않는 후설의 저작까지 적당히 빼곡하게 꽂혀 있다. 홀에 앉으면 나의 배후를 제외한 삼면의 서가가 전경으로 나타나는데, 따뜻한 온도의 등이 서가의 책들을 내리쬘때면, 책들이 알록달록한 반도체 칩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채로운 색의 옷을 입은 봄의 군중들이 모인 광장같이 보인다. 오늘은 천장을 보니 구름 한점이 없다. 푸른 천장과 주황색 서가, 미니멀한 1인 소파에 앉아 화가가 될까, 시인이 될까를 고민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라는 작자는 움직이고 행동하는 시간보다 앉아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더 많은 유형에 속하는 인물이다. 오죽하면 스스로를 거친 땅을 부드럽게 갈아엎는 지렁이로 표현할까. 그러나, 나답지 않으면 결국 멋이 없더라던 어떤 래퍼의 가사처럼, 나답지 않으면 영 입안이 텁텁하다. 어제는 아름다운 들판을 달리며 차안에서 지인이 토로하는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는 자신이 게으른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스스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최근에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이슈는, 자기 자신의 맨 얼굴을 보기를 매우 두려워해서, 그것을 덮어두고 살기 위해 갖은 몸부림을 치는 것에 있었다. 사람은 부정신호로 교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은, 긍정신호가 나올 때까지 자신을 그에 맞추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고 찰나의 긍정적 결과물에 잠시 잠깐 고단한 몸을 기대고는, 다시 부정신호의 썰물에 떠밀리곤 한다.  

나는 질문한다: 이것이 창조주가 우리에게 선사한 삶일까? 창조주는 정말, 어리석고 불투명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우리가 채근하며, 나의 맨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그저 표면을 매끈하게 무두질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게 하였는가? 

신학적 용어로 종말론적 미래라는 말이 있다. 우리의 과거와 미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표현대로, 현재 안에서만 존재하는 과거와 미래이다. 생각하고 기억하는 현재가 있기에 우리는 현재 안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 안에서 미래를 기대한다. 그래서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미래는 현재의 미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재의 충일함을 누리지 못하고, 이 현재가 시간의 거친 물살 가운데 요동치고 갈갈이 찢겨지는 고통스런 실존 가운데 있음을 보았다. 그가 필요로 했던 것은 영원한 하나님이 시간 속에 고통받는 자신을 품어서 들어올려, 찢겨진 시간성 자체인 자신을 치유하고, 통합하는 사랑의 경험이었다. 

내가 연구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종말론적 미래는 단순히 나를 지금의 고통스런 시간에서 들어올리는 무시간성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론적 미래는 나의 현재의 과거나 현재의 미래와는 질적으로 다른 희망의 미래이다. 차마 감히 희망할 수 없는 것, 길고 긴 겨울 가운데 신음하면서 잃어버렸던 기쁨이 회복되는 것이 종말론적 미래이다. 미래는 나의 현재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종말론적 미래는 나라고 하는 시간의 끝에 있고, 바깥에 있고, 그렇기에 나의 모든 시간을 포괄하고 감싸안을 수 있는 유일한 나의 통일성이 된다. 나를 고통의 현재에서 들어올리는 영원은 무시간성을 의미하지만, 종말론적 미래는 이 고통의 터널의 끝에 비춰오는 큰 빛이 있음을 약속한다. 그것은 모든 시간을 통일하는 궁극적 시간이라는 점에서 '지금 여기' 있고, 나의 현재가 내뻗는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직 아니'다. 이 미래는 내가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 성큼 다가오는 저편의 미래이다.

Qui quaerit, nescio. 나는 그것을 경험할 뿐이고, 누가 나에게 그 종말론적 미래를 묻는다면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대는 미래적 인간인가? 내가 믿는다는 점에서 이미 그렇다. 그대는 미래적 인간인가? 내가 그것을 희망한다는 점에서 아직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사랑만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모른다. 나는 아직 아니와 이미의 긴장에 있는 실존이고, 아파하는 겨울나무이며, 움이 돋아나기 전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는 가지이며, 불거져나오는 순을 희망하는 땅에 속한 자이다. 나는 먼지이다. 나를 약동하게 하는 것은 생명의 영이며, 나 스스로가 아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은 완전한 Ja, 긍정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겪는 것은 Noch nicht,라고 하는 부정성이다. 이 아픔을 온전히 바라보는 자, 자신의 맨 얼굴을 '끝까지' 응시하는 자,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품는 자만이 부정성에서 긍정성으로의 운동을 꿈꿀 수 있다. 십자가의 죽음은 맛보아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그 죽음 자체를 온 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실체이며, 현실이다. 믿는 그것이 실체가 되기 위해서는 끝까지 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정직해야 한다! 아파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십자가를 통과하는 유일한 좁은 길이고, 사람들은 이 좁은 길을 좋아하지 않는다. Bear the cross as you wait the crown. 믿지 못하는 것은 강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하지 못해서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사랑 때문에 약해지는 것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초대가 나를 겨울의 한복판으로 끌고 갈 때, 그 손을 뿌리치기 때문이다. 

나는 겨울을 통과한 모든 작고 약한 것들에게 사랑과 격려를 보내련다. 가장 약한 것에서 가장 영롱한 초록이 나온다. 가장 아팠던 상처부위가 생명의 싹이 나는 공간이 된다. 생각보다 터널은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봄이 어느새 성큼, 다가온 것을 보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창조주는 피조물에게 얹어두지 않는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