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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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수기, 튀빙엔의 흔적들

jo_nghyuk 2023. 1. 22. 23:12

 

흔적들이 겹쳐지면 의미를 형상화한다. 

나는 튀빙엔 대학 도서관에 앉아 있다. 아침 7시에 출발해서 12시 30분이 되어서야 기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네카 강 옆의 중국 식당에서 회과육을 먹고, 골목들을 걷고, 또 걸었다. 골목의 어느 순간 순간 7년 전 기억의 부분들이 재생이 되었다. 이곳을 겨울에 오는 것은 처음이다. 관광객도 없고, 햇살도 없고, 상점들도 문이 닫힌 몇천년의 고도를 걸으며 역사성을 되새기는 시간이었다. 몇천년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은 겹치고 겹치며 역사성 자체를 형상화한다. 단순히 어떤 가게와 집들과 거리로 이루어진 공간을 넘어 수많은 시간을 지나며 형성되는 긴 지속duree longue의 멘탈리티 같은 것까지 느껴지는 겨울의 아침이었다. 천년고도를 방문하면 역사적 의식의 감각이 확장되는 것을 경험한다. 나는 골목과 언덕과 계단을 오르내리며 길고 긴 어떤 시간을 관통하는 어떤 감각을 배양하는 중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래된 대학 도시에는 반드시 힙한 카페가 있기 마련이다. 구글 지도에서 카페 몇 가지를 찾아놓고, 하나 하나를 푯대와 이정표 삼아 골목을 굽이치는 시내처럼 튀빙엔 구시가지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카페 후보 중 한 군데를 골라 들어가 커피 원두의 종류가 어떤 것이 있는가 살펴보았다. 예상 외로 hand brew 커피도 있고, 케냐, 베트남 등의 원두들도 팔고 있는 제법 진정성 있는 카페였다. 케냐를 주문해서 마시는데 으레 예상하던 와인스러움이 아니라 살구와 베리향이 나는 산뜻한 커피였다. 나는 튀빙엔을 화사한 여름에만 방문했었다. 흐린 겨울 오후에 마시기에 제법 기분 전환이 되는 커피 향이었다. 

사실 겨울에 방문해서 더 좋다는 생각도 한다. 사람이 없고, 조용하며, 적당히 외로워질 수 있는 그런 시간이 참 반갑다. 커피를 마시고 이번에는 기억을 따라 교회가 있는 마을 어귀를 지나 공원을 가로질러 큰 길가로 나왔다. 버스 티켓이 있었지만 걷는 것이 좋아서 계속 걸었다. 뮌헨이나 종로에 가면 큰 길가를 하염없이 걸을 때 발견하는 좋은 건물들이 주는 유쾌한 멋이 있다. 걷다가 대학 건물이 나오고, 도서관이 나오고, Hegel 건물도 있었다. 2016년의 나는 헤겔을 몰라 이 건물을 지날 때 주눅이 들었던 감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2023년의 나에게 헤겔은 싸울 맛이 있는 최종보스처럼 여겨진다. 

걷고 또 걸으며 기억들의 흔적이 자리를 찾아가고, 또 복원되면서, 이 의미들이 예전의 것의 복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오히려 기억은 복층 구조를 이루는 의미들의 집이다. 같은 사건을 또 다르게 접근하는 미래의 새로운 내가 그 단층들을 추가해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적의 재발견을 하는 것은 지금의 나, 미래의 나라는 점에서 언제나 재형상화이다. 모든 경험과 사건은 다시 형상화되어질 수 있다. 그게 내가 설교를 전하러 갈 수 있는 희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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