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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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름과 내어줌

jo_nghyuk 2023. 8. 11. 05:49

지금은 슈투트가르트에 있다. 꼭대기 층의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밤공기를 쐬며 독일 회사에서 나온 요거트를 먹는 중이다. 이 도시는 내가 지도교수님과 콘탁을 하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들어온 독일의 도시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를 아내에게 하니 ‘처음 들어온 곳으로 마지막 독일의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나의 처음에 끝의 씨앗이 이미 있었던 것일까. 그때 나는 몰트만 교수를 튀빙엔에서 만난 후 떨리는 마음으로 예나로 떠났었는데, 이제는 유학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있다.
사람의 앞길은 도무지 알 수가 없기에, 시작에 그 끝의 씨앗이 존재한다는 말은, 미래로 나아가고, 과거를 회상하는,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지는 가운데에만 존재하는 인간의 시간의 차원을 넘어선 어떤 한계 관념으로서의 신적인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거기에는 나의 출생과,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출생과, 나의 죽음이 모두 현재처럼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모두의 삶이 그 앞에 늘 존재하고 있을지도.
스트라스부르를 가기 위해 계획했던 것이, 여권을 가져오지 않으면서 모두 불가능성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여행을 가면서 여권을 챙기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날까지 논문의 결론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어떤 섭리라도 작용한 것인지, 스트라스부르의 마트에서 프랑스 회사의 요거트를 사먹고자 했던 나의 조촐한 야망은 무산되었고, 아쉬운 마음에 오늘 우리는 차를 빌려 튀빙엔으로 향했다.
튀빙엔을 아내와 아이와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흔적의 재형상화를 이루었다. 지난 번 갔던 중국 식당에서 회과육을 시키고, 그 카페에서 플랫 화이트를 마시고 원두를 구입했다. 그 어느 것도 어제까지의 나의 머리 속에 계획한 것이 아니었지만 가고 오는 거리도, 아이들의 컨디션도, 음식도, 커피도 모든
것이 적절하고 아름다웠다. 몰트만 교수 옆에 앉아
예배를 드리던 교회에 다시 한 번 들어가 보고, 혼자 쭈그리고 앉아 파스타를 먹던 교회 계단 앞에 이제는 나의 아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혼자였던 곳에서 나는 새로운 경험과 함께 그 장소에 새로운 색채를 입히고 있다. 확실히 색채는 다양함이 함께 모일 때 발생하는 레조넌스이다.
논문 결론을 쓰다가 문득 반 고흐가 그린 노란 의자를 떠올렸다. 그 의자는 반 고흐 안에 존재하던 의자이다. 반 고흐와 관련을 맺게 됨으로, 이제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 의자를 알게 된다. 그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이다. 심지어 고갱의 의자 조차도 반 고흐 안에 존재한 고갱의 의자라는 점에서 그가 그린 모든 의자는 모두 그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것이 아니라, 그의 안에 머물렀던 것이다.
내가 슈투트가르트를 방문했지만, 이 장소는 나의 안에 있다. 튀빙엔도 그렇고, 내가 만난 사람들도 그렇다. 나도 그 장소 안에, 그 사람들 안에 거했을 것이다. 어떤 인상을 남기고 사라지는가는 나의 인격의 성숙함과 미성숙함의 사이에서 결정될 것이지만, 우리 모두는 수고로움으로 인하여 서로를 배려하고, 나의 것을 내어줌으로 서로를 섬긴다. 나의 것을 내어주지 않고 그 사람이 내 안에 거할 수는 없다. 내가 가진 것을 줄 때에만 어떤 장소와 사람이, 또는 사건이 내 안에 머무른다.
나의 시작에 끝의 씨앗이 있듯이, 나의 끝에도 다른 사람의 시작의 씨앗이 있다. 나의 아들도 그러하고, 내가 유학을 마칠 때에 유학을 시작하는 나의 지인들도 그러할 것이다. 시작과 끝과 다시 시작의 연쇄는 관련을 통하여 결정되는 것이지, 기계적 연결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냥 신학부를 거쳐갔던 헤겔과 나의 연관성 만큼이나 관계의 농도는 희박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나는 내어주는 사람이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더 내어주려 하는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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