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배제와 포용, 2장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배제와 포용, 2장

jo_nghyuk 2012. 11. 5. 01:15
자아가 타자-특히 멀리에 있는 타자-에게 세계의 나머지 공간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온전한 권리를 부여하면서 스스로 자기 영토를 보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에서도 충분히 배제가 일어날 수 있다. 경계를 긋고 유지하려면 자기를 주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대개 그것은 타자의 삶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 자기 경계에 대한 위협이며, 따라서 자아의 내적 구조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아의 건전한 자기 주장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139-140쪽)

나는 바운더리가 분명한 편이다. 게다가 상당히 고지식한 (고집 센) 면까지 있다. 그런데 내 안에서 정직하게 대면한 모순은, 볼프가 지적하듯이, 스스로의 편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재설정하는 바운더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보다는 악마가 좋아할 만한 자세이다. 아아, 오히려 나는 극심한 위선자가 아닌가? 원칙을 고수하던 (그리고 순간순간 자의적으로 변형시키던) 내가 오히려 괴물이었던 것이다. 

제 2장 "배제" 까지 읽고 내린 생각. 내 안의 경계설정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지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내 인격은 더 정직하고, 더 순결하며, 더 아름답고, 더 풍성해질 것이다. 또, 자의적인 변질이나 타협이 없을 것이다. 동시에 참으로 유연한 자유함을 보이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는 순결한 위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어줄 것이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나의 "옳음"이, 나의 "경계설정"이 폭력으로, 억압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지 않도록 말이나 행동에 있어 조심하고, 지혜롭게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타인이 나의 "선함"으로 인해 죽는다면, 나는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세리"와 같이 된다면, 나는 나의 구원을 버리는 꼴이 된다. 

나를 거짓된 것에서 멀리하고, 참된 것을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참되다. 그러나 그 구분선은 내 안에 있지, 타인의 영역을 건들지 않는다. 너는 타인을 자유케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슨 척도를 가지고 자유롭게 할 것인가? 니체의 초인처럼, 인간의 척도로, 혹은 스스로의 초극된 척도로 할 것인가?
단 하나의 척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될 것이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그의 모습들이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질서에 순복하고, 동시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전혀 상황적이지 못한 정태적인 관습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순결하다. 그는 상황적으로도 순결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참되고 더 깊은 율법으로 기존의 불완전한 율법과 관습을 풍성하게 완성시킨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절대로 순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확실하면서도, 타인에게 자유를 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용인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자유를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이다. 자유하나, 나의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섬기는 종으로서만 나는 사는 것이다. 

타인이 나의 "선함"으로, 나의 "옳음"으로 시들어가고 있다면, 억압당하고 있다면, 너는 문자적인 율법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율법은 상황을 배제하지 않는다. 사랑은 가장 심각한 죄인의 옆자리까지 찾아간다. 그를 살리기 위해서. 결국 나의 "의"는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죄"로 죽이는 반면에, 사랑은 나를 비우고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전히 

사랑은 순결을 유지하는 한에서 역사한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까지 달리셨지만 죄는 없으셨다.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셨지만 죄를 짓지 않으셨다. 

이제 나에게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긴다. 이것이 정말 가능한가?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예상 가능한 현실의 적용으로부터는 가장 멀 것이며 오히려 사랑의 여정의 출발에 가까울 것이다. 사랑은 기약이 없는 자를 끝까지 참아주고 복돋아준다. 끝내는 실패할 위험도 감수한다. 그러나 사랑은 절대 배제된 사람을 그대로 놔두지 않는다. 사랑은 언제나 그를 향한 떠남이며, 여정이며, 추구이고, 회복을 향한 성실한 일함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여행가방을 쌀 생각도 하지 말라.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