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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건축과 꼴라쥬, 블로그와 페이스북의 글쓰기

jo_nghyuk 2014. 2. 11. 14:57

글에 대한 구조화 작업이 이제 나에게는 적실하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에 올린 글은 위성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중 많은 것은 그저 우주 쓰레기와 같은 사유나 정서의 부유물일 것이다. 

단순한 노력을 넘어서서 이제는 성실성과 근면성이 또한 필요되어지는 것 같다. 사실, 페이스북이나 메모장, 에버노트에 끄적이는 글들은 말 그대로 끄적이고, 깨작이는 것이다. 나는 문장을 다듬지 않고, 단어를 고민한다기 보다는 창출하고, 결론을 내기 보다는 항해하고 임시 정박하여 글을 ‘쉽게’ 포스팅해왔다. 그러나 그러한 글들을 누가 가치있는 사유로 볼 것인가? 사유하던 것을 발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며 느끼는 것은 발화한 것이 담화 조차로도 이동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광장에서 소리치는 것만 같아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멈춰서서 잠시 내 이야기를 듣고 다시 자기 길을 간다. 얼핏 보면 시차적으로, 오늘 오전 7시에 말한 나와 오후 1시에 뉴스피드를 읽는 타자가 대화할 수 있게 된 것 같지만, 그것은 허구적 관념일 뿐이며 담화라고 할 수 없는 자보 수준의 매우 단순한 층위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한다. 라는 결론 만으로는 부족하다. 홀로 사유함과 사람을 만나 대화하며 견고히 함의 도식만으로는 그저 몇자 더 읽은 허풍선의 장기자랑이요, 이상의 권태로운 친구와의 바둑두기에 지나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제대로 쓰지, 않고 살아온 것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말하기와 다르게 쓰기는 보다 견고하게, 단어 단어를 밀고 나가기 전에 멈추고 사유하며 시차적으로 조립해나갈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나의 글쓰기는 그저 말한 것을 속기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몇자의 오타와 틀린 생각들을 순간순간의 순발력으로 대응할 뿐인 그런 글쓰기. 

게임 이야기를 하자면, 턴제 전략시뮬레이션에서 실시간 전략시뮬레이션으로 넘어오면서, 전략과 더불어 순발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 것처럼, 나는 바쁜 메트로시티에서 SNS로 뉴스를 읽고, 짤막한 (그러나 객관적이라 할수없는) 기사를 읽고, 타자의 삶을 몇 문장과 이미지와 편집된 삶의 움직임들을 빠르게 긁어모으고 나름 취합해가며 실상은 미드콘드리아와 같은 작고 빠르고 놀라운 사유를 경박하게 지속해오던 것은 아닌가?


언제부터 저널을 쓰기를 중단했는가? 그것은 반성적 사고를 그치고 밀린 일기과제를 매일의 기상일보처럼 기록하면서부터이다. 

그것은 소설이나 신학서, 철학서 혹은 시집에서 인상깊었던 문체를 내것인양 내 말투로 무분별하게 전유하면서부터이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송두리째 나에게 옮겨왔는가? 어쩌면 나는 허구적인 아우라만을 빌려온 후 착각 속의 글쓰기를 (실상은 쉽게 발화하기를) 해온 것은 아닌가?


키보드는 이제 나의 치아가 되었다. 자음과 모음을 빠르게 타이핑하며 나는 그냥 말하듯이 단어를 조합한다. 그러나 너무 쉽게 글이 써진다면 그 글의 밀도를 의심해보아야 한다. 묽은 사골국은 있을 수 없는 단어 아니면 실패한 어떤 목표의 표상이다. 그런데 나는 너무도 자주 아이폰의 가상키보드로 묽은 사골국 같은 글을 내오고 있었다. 

소유라멘을 만들기 위해서는 질 좋은 간장을 육수에 정성스럽게, 오래 우려내야 한다. 면을 만듦에 있어서도 좋은 요리사라면 좋은 재료와 마음가짐으로 면을 뽑아낼 것이다. 속도가 문제가 아니라 만들어내는 방식이 구조적이냐, 즉흥적이냐의 문제이다. 


여전히 인스턴트는 인스턴트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블로그, 혹은 맥의 페이지스 / 페이스북, 아이폰의 에버노트

이런 도식화와 유형론적인 사고를 할 마음은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닌 것은 여전히 아닌 것이다. 아닌 것이 아닌 것이 ‘아닐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원래 도구와 방식을 포기한 대가로 적실하지 않은 도구와 방식으로 멀고 희미한 우회로를 선택해야 한다. 그게 자의성에 대한 대가일지도 모른다.


참되게 통전적인 사유와 글쓰기를 하려면 전통을 소화해내야 한다. 참되게 개혁의 운동성과 역동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반대편의 것을 충분히 사유하고 체화해내지 않으면 안된다. 흉내만 낼 뿐인데, 나는 전통의 아우라로 미봉하고 싶지 않다. 교토는 교토이고 에도시대의 영화거리는 영화거리이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테르담이고 하우스텐보스는 하우스텐보스이다. 아우라와 대량생산, 아니 더 심원하게 시대적인 키워드를 그저 가볍다고 비판하려는 것이 내 의도가 아니다. 정위시키고, 똑바로 하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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