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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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타자, 신의 협동

jo_nghyuk 2015. 2. 16. 13:42

한동안 시고 소설이고 다 쓰기 싫을 때가 있었다. 아니면 자신감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것이, 우리는 자신감이란 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응집시키고 응고시켜서 이루어내야 하는 어떤 것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잘 해내지 못한다. 주변에는 천재성이라고 할 만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생각보다 자신감이 매우 부족한 것은 아닌가, 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신에게서 오는 것인가, 나에게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타자에게서 부여받는 것인가. 아담 자가예프스키는 타자만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노래했다. 나는 신과 자아와 타자의 역할을 분리하고 싶지 않다. 이 삼각형은 어떤 고리의 순환을 이루냐면, 내가 타자를 도울때 타자는 힘을 부여받고, 역으로 나는 힘이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다른 타자에게서 다시 나는 힘을 부여받을 것을 기대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순환고리가 그다지 이상적으로 이곳에서,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자아는 모든 타자를 기다릴 뿐, 나아가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기다리고 있다.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존중하는 리더의 격려 때문이었고, 

시를 다시 쓸 수 있었던 것은, 나희덕 시인이 직접 나의 '미친 탈주'를 격려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시를 그만 둔 것도, 타자들의 나의 '미친 탈주'에 대한 경계와 억압적 선로 변경의 강요에서 온 이유였다.


구원도 타자에게서 오고, 타락도 타자에게서 온다. 신은 타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신이 나를 타락시켰다면, 그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왜곡시킨 우상임이 확실하다. 인간에게는 애초에 구원의 능력이 없다. 누군가를 구하고 나면, 내가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 죽음의 희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다. 내가 누군가를 구하려면, 나는 나의 죽음을 대가로 치루어야 한다. 그래서 자신감이라는 것은 나 혼자 응결해낼 수 없다. 나의 역할이 있고, 타자의 역할이 있다. 그리고 타자 안에 그리스도의 역할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돕는 타자 안에도 있고,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타자 속에도 계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때로는 주구장창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타자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기도 하다. 자신감은 타자를 통해 부여된 힘으로 다시, 내가 응결시키는 것이다. 타자 없는 자신감은 응고된 피이다. 그러나 타자가 힘을 부여한 자신감은 응결된 피와 같아서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로 다시 흘러간다. 나, 나, 나만을 생각하고 자수성가한 사람은 응고된 피를 그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 그러나 타자에게서 도움 받고, 그 감사함을 깨닫는 사람은 나라는 응고된 피의 감옥에서 벗어나 비로소 타자를 향하게 된다. 타자에게 흘러가게 하는 이 힘은 나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격려에서 온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모두가 팀플레이를 하며 서로를 돕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깊은 층위에서, 하나님과 사람은 협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경건은 마지막 층위를 발견하는데, 다시 이전의 층위적 사고를 지양하며, 결국에는 하나님이 하셨음을, 하나님이 근원이며 이끌어 오시고, 격려하였음을, 그리고 완성하였음을 고백하고 감사하며 찬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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