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말테의 수기를 보면 말테 브리게가 파리의 한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는 엄숙한 장면이 나온다. '이 가난한 내가 도서관에 앉아 시인을 가지고 있다' 브리게는 가난하지만 시인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근래 예나에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배우는 중이다. 1807년에 헤겔은 예나에서 정신현상학 집필을 마쳤다고 한다. 200년이 지난 지금 가난한 나는 그가 강의했던 대학에서 프랑스인에게 그의 철학을 배우고 있다. 헤겔은 파리에서 집권한 나폴레옹을 보며 절대정신의 현현이라 외쳤는데, 그 절대정신은 스스로를 예나까지 외화하여 독일을 지양시켜버렸고, 헤겔의 교수직마저 파기aufheben되고 말았다. 나는 파리에서 진군한 프랑스인 학자에 의해 나의 두뇌와 지식의 자기소외를 한껏 경험하는 중이다. 그의 이름 또한 장jean인데..
삶의 기쁨. 생생한 현재. 그것을 살고 싶어서 다시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기로 했다. 일단은 SNS 계정을 다 탈퇴해버렸다. 포도원을 조금씩 망쳐가는, 함께 살던 작은 여우들 중 몇 마리를 쫓아내었다. 다시 아침에 기도를 드린 후에 종이책으로 된 Basis Bibel을 읽는다. 또는 뉴스를 보거나 독일 신문잡지를 읽는다. 어제는 하루키의 소설을 독일어로 읽었다. 불과 2007년, 그러니까 14년 전에는 겨우 영어로 읽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독일어로 읽고 있다. 시간 문제이다. 프랑스어를 시작할 때 아내는 나의 유난스러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반년이 지나고, 일년이 지난 후에 파리에서 나는 프랑스어를 말하고 있었다. 주변의 시선은 지나가고, 마침내 바뀔 것이다. 미니멀리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이것을 ..
나는 교회 앞, 가을 햇살이 힘차게 내리치는 광장을 걷고 있다. 샌들을 신고 걸으면 울퉁불퉁한 돌바닥의 감각이 몸 속까지 침투해서 약간의 이물감 같은 것을 남긴다. 무언가를 사유하면서 광장의 첨탑과 구조의 생김새를 관찰하면 전에 보이지 않던 부분들이 보일 때가 있다. 사유가 시선에 힘을 실어줄 때가 있다. 더 정확히는 시선에 생동감을 부여할 때가 있다. 어떤 생각의 단초를 발견하거나 생각들이 고양되기 시작될 때에 기존에 보여지던 것들에서 한층 더 깊어지거나, 한발짝 더 나아간 듯한 시선을 획득할 때가 있다. 그건 아마 릴케가 쓴 말테의 수기에서, >나는 보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너만남의 시간
돌파가 안되고 도리어 엎드러질 때에, 스승으로부터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 약해지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야속하다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왜 약해서는 안되는지, 더 정확히 나까지 약해져서는 안되는지를 깨닫게 된다. 모든 돌파는 직선적 힘을 필요로 한다. 곡선의 유려함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매번 그것이 요청되어지는 순간마다 강이 허리를 구부리듯이 유속을 느리게 하며 퍼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세계에는 직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리듬조차도 자신이 품은 직선적인 등골 덕택에 지속될 수가 있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의 운동이라기보단 그저 늙은이의 방랑처럼 맥빠지고, 탕자의 질주처럼 어리석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게 되지 않을까? 앞으로 할 일..
참 오랜만에도 글을 쓴다. 글이야 논문을 통해 늘 쓰고 있지만 스스로의 내면으로 내려가서 푹 꺼진 소파에 눌러앉듯 자신을 톺아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말이다. 아침에 5시 30분이나 6시에 눈이 떠진다. 30분 거리의 시내에 있는 기도처에 걸어나간다. 숲길을 골라서 한적한 주택가를 골라서 사람이 없는 공간을 고르고 골라 몸을 밀고 나간다. 아침에 산책은 개운하고 저녁에 아내와 하는 숲길 산보는 상쾌하다. 보난자에서 엘 살바도르 커피가 왔는데 와인 맛이 나서 놀란 마음에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갓 볶은 원두인데 지금 먹어야 할 것 같다고. 지인을 불러서 감탄하며 한 번 더 마셨다. 보통은 3-4일에서 일주일 사이에 숙성이 되면서 맛이 깊어지는게 로스팅의 묘미인데 산딸기 같은 이 원두는 따자마자 깨물어 먹을..
하이데거를 계속 읽고 있다. 이 해석학자는 아는 것이야말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외친다. 우리는 그냥 살지 않고 우리가 이해하는 것을 기반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이해의 폭이 넓으면 더 멀리 갈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슬퍼할 수도 있는 것이다. 행복은 외재적이지 않다. 성경도 중요한 것은 영혼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한 감사는 생동성으로 가는 뇌관을 건드리는 일이다. 무엇이든 집착하는 것은 아름답지 못하고 자유롭지도 못하다. 히브리인들은 사람의 중심을 콩팥이라는 재밌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의 총체는 머리에 있지 않고 저 깊은 심연 속에 처소를 두고 있다. 아내가 임신을 한 후로 나에게는 한 겹의 정체성이 더 생겼다. 그건 바로 아내가 하던 모든 일들이다. 나는..
참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는 것 같은데 이 공간에는 뭔가 나 자신이 정돈되지 않으면 쓰기 힘든 역장이라도 발동되는 건지 글을 쓸 엄두가 흐트러져 있을 때에는 나지를 않는다. 스스로를 추스리고 나서야 뭔가를 쓸 기분이 든다. 알람도 맞추지 않고 열시, 열한시에 일어나는 삶을 한 달 정도 지속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6시에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아마 크게 뭔가를 내면에서 전환하고 나서 그게 시작된 것 같다. 그런 순간들은 위기이기도 하고 모멘텀이 되기도 한다. 이겨내면 치고 올라가지만, 겪는 중에는 그냥 앓는 느낌밖에는 없다. 앓고 앓다가 어느 순간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나라고 하는 전체가 다시 새로운 구조로 탈바꿈하는 듯한 그런 경험을 반복한다. 이 과정이 삶에서 수천번은 반복되는 것 같다. 인식하는 것은..
다른 이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는 것은 상호주관성의 단초가 된다고 후설은 말했다. 편한 삶을 사는 이는 그래서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오직 아파하는 사람만이 뚜렷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 의문의 모호성 때문에, 그 '앞서 있음의 실존' 때문에 그는 그래서 더 아프게 될 것이다. 이해하게 되는 자는 더 오해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파할 필요가 없었지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아파하는 하나님이 되셨다. 본회퍼는 이런 맥락에서 오직 고통을 겪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세계의 아픔에 대해 닫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의미에 다시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십자가의 아픔은 세계의 아픔에 대한 하나님의..
한 미래학자는 말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세계는 느려졌다. 앞으로의 삶에서 사람들은 더 적은 것을 가지고 잘 사는 법을 익혀야 할 것이다, 라고. 그는 왜 바이러스로 인해서야 비로소 우리가 자동차 이용을 비롯한 환경문제에 있어 잠시 멈출수 밖에 없는지 반문하였다. 가속화되던 세계가 겨우 느려졌고, 사람들도 아주 느리게 적응 중이다. 비자를 받으러 관청까지 걸어서 갔다 돌아왔다. 아마도 몇달간의 삶은 계속 이렇게 느릴 것이다. 논문이 진행되던 속도도 느려진다. 이상한 말이지만 시의적절하게 하이데거를 읽고 있는 기분이다. 그는 세계가 위협적으로 덮쳐오는 것의 현실성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리 이성적인 동물이어도, 자기 기분에서 출발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사람이 아무리 의지가 있어..
어쩌면 나를 철저히 외롭게 만드시는 그분의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참을 수 없이 가볍게 느껴져서 이 시간을 계기로 조금 무거워지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이해는 자신의 환경과 구조와 역사의 구성물이다. 다른 이가 나를 다 이해해줄 거라는 생각은 그래서 나이브하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이 내 외로움의 원인이라면 나는 나를 알아주지 않을 사람 앞에서 인정을 받고자 하는가. 내 동기가 온전한 데에서 나왔다면 왜 나는 그것을 무지함 앞에서 증명하고자 하는가. 그러한 노력 또한 인정욕구에 기울어진 온전치 못한 마음일 뿐이다. 가끔 답은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일 때가 있다. 이렇게 철저히 외롭고, 실망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를 나도 모른다. 그러나 당분간은 철저히 실망해보아야 함을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