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오랑쥬 껍질 씹기 (170)
저녁의 꼴라쥬
간밤에 꿈을 꿨다. 분명 그건 영적인 대적자였고, 나는 능력이 딸려서 힘을 떨치지 못했는데 그 기분이 여간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인해 집에서 논문을 쓰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글을 다시금 정리하고, 다듬으면서 이 사람이 왜 성인으로 불리우는지 깊이 체감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어려움에 당하거나, 심지어 지적인 곤경에 처할 때조차 기도하는 부분에 대해 교수님이 연구하라고 하셔서 그가 기도하는 대목들을 고백록에서 찾아보았는데, 세상에, 멀미가 날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가 늘 기도를 통해 자신이 존재론적인 곤경을 늘 넘어갔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읽으면서 반성을 넘어 회개를 하게 되었고, 그게 코로나 사태를 통해 선배 목사님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회개의 때'..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한다. 도서관에는 큰 창이 나 있어서 연구를 하는 동안은, 계속 빛을 볼 수가 있다. 나는 거실에서 책을 읽거나, 작업을 하는 것을 선호하는데, 그게 빛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건물의 창만큼이나 큼지막하게 난 창문으로 들어오는 채광이 기분을 산뜻하게 한다. 하이데거는 환경에 던져져 있는 것을 정황적인 것과 기분적인 것을 모두 표현하는 단어로 표현하였다. 인간은 기분적 존재이고, 그 기분을 통해 존재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감성적이라는 것이 덜 이성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건, 그냥 신경다발이 더 풍성해서 괴로운 것 뿐이다. 독일 사람들은 정초한다,는 표현을 참 좋아한다. 건축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이 표현은 스스로를 어..
지난 주에 후설에 관한 연구를 마쳤다. 바로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고 했지만 몸에 무리가 왔다. 새벽에 겨우 일어나 욕실까지 당도했다가 침대로 돌아왔다. 독일 신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들은 끝의 끝의 끝까지 사고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비관의 트랙을 끝까지 달린다. 아는 것이 힘인지, 아는 것이 독인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 슬픈 것은, 이 정도의 지성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가난하고 약한 이웃에 대해 (하다못해 자국민이라도) 사유하는 대목을 기사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하이데거적인 나의 죽음의 문제일 뿐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선취한다. 나는 나의 죽음을 앞당겨 본다. 나는 그것의 불안을 받아들이되 그것을 극복한다, 등등. 강한 나의 곁에 약한 이가 없다..
즐거운 삶보다 깨어 있는 삶이 낫다. 즐거운 삶은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만, 깨어 있는 삶은 자신을 포함한 생명세계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후설의 후기 시간론을 지나 상호주관성의 연구에 접어들었다. 그동안은 수기를 쓸 여유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도를 하고, 빵을 먹고, 연구를 하고, 감자나 파스타를 먹고, 다시 연구를 하고, 다시 기도를 하고, 밥을 먹고, 쉬고, 밤에 잠에 드는 사이클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이클도 머지않아 끊길지 몰라 미리 수기를 기록해 두는 것이다. 나는 지향성 연구의 끝이 왜 상호주관성인지 알지 못했다. 후설이 왜 단순한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인지 아직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후기시간연구를 끝으로 상호주관성에 ..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레귤러한 삶을 살게 되었냐고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야말로 삶의 회심에 가까울 따름이다. 기도 중에는 심지어 소홀히 했던 해석학 수업에 다시 들어가야 할 것 같은 감동을 받아버려서, 원치않던 발제를 준비하느라 이번주는 프리저 후설을 만나지도 못하고 해석학 기뉴 특전대와 갑자기 치고받는 혈투를 벌이고 있다. 쟝 마르크 교수가 발제를 권유할 때 쉽게 가려고 골랐던 영어 텍스트가, 결국엔 다 독일어로 다시 작성해야 하는 일감이 되고 말았다. (덕분에 논문은 손도 못대고 있다) 가다머와 리쾨르가 순서대로 해석학에 대한 각자의 주장을 전개하는 부분을 끝내고, 이제는 간단한 토론만을 남겨두고 있다. 그런데 이 둘이 인용하는 학자들과 사상사가 너무 방대하여서, 발제 준비인지 논문 작성인지 ..
늘 정해진 시간에 도서관에 온다. 오늘도 개인 연구실을 빌려서 논문 진행을 하는데, 담당 직원 분이 내 방 문을 노크하시더니 빈 연구실이 있다고, 여느 때처럼 매일 여기 올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그렇다고 대답하고 서류에 서명을 하고 새 열쇠를 받는다. 이전 방과 다르게 밖으로 크게 난 창으로 공원과 공원을 가르지르는 다리가 보이고, 백조나 사람들이 뒤뚱뒤뚱 걸어가는 풍경을 받아들이는 그런 공간이었다. 뜬금없이 나는, 독일 유학을 오기 전 노트북 화면에 있던 하이델베르크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숲이 있었고, 강이 있었으며, 교회가 있고, 풍경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철학을 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 산을 올라야 하는, 그런 도시였다. 점심 식사를 한 후 나는 공원 산책을 했다. 한시간 여를 걸..
정말이지 미쳐버릴 것만 같다. 철학하는 이들이 왜 좀 미쳐있는 것 같은지 이해가 될 정도로. 아침에 기도를 하는데 근원Urquelle에서 오는 힘이 넘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 와서 개인 방을 빌리고, 후설을 읽어내려간다. 후설의 시간의식에서 과거에 대한 정리를 마치고 현재의 비밀의 장막을 걷는다기보다 그 장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미래다운 미래는 아직 오지도 않았다) 이 철학자는 죽기 직전까지 철학적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천착하기 위해서는 질긴 탄성이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늘 기도하고 막히면 또 기도하는 삶을 산다. 그러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작업을 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상쾌함을 최근에 느끼는 중이다. 독일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인가. 아침에 얼굴을 씻다가 ..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를 절대의존의 감정Gefühl der absoluten Abhängigkeit이라고 표현하였다. 나는 감정을 색채 또는 자발적인 채색으로 본다. 최근에 소콜로브스키의 을 읽다가 후설이 에서 했던 표현에 주목했다. 색은 연장된 것의 (말하자면 공간적이게 된 것의) 국면/계기moment라는 말이었다. 나는 왜 연장된 것의 국면이, 왜 형식적 차원을 의미하는 선이나 면이 아니라 색이라고 표현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실 후설이 의미한 결과 다른 방향의 생각이었지만) 우리는 선이나 면을 그것 자체로 파악할 수 없고 검정, 과 같은 색의 매개를 통해서 파악한다. 후설의 표현대로 파악은 감각이라고 하는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말하자면 간접성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자체의 직접성..
1917/18년에 작성된 후설의 를 읽고 있다. 1905-10년에 편집된 에 비해 보다 원숙해지고 풍부해진, 이를테면 한 학자의 사유의 심해 가운데로 자맥질하는 기분이다. 그의 후기 사상까지 추적해 들어가고 있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수압이 높아 저항감이 심하고 속도가 빠르지는 못해도, 매일의 훈련은 나 자신의 압력을 팽팽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자신의 수행능력Leistungasfähigkeit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은 교만이라는 아침의 설교를 들은 후에, 나는 어느 부분에서 매여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설교를 삶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직선적인 영성으로서 정직이 필요한 동시에 구체적 삶의 정황으로 진입하기 위한 우회로를 또한 차분히 톺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해석학 수업을 매주 한..
기도원에 다녀왔다. 돌아와서 신년 대토론을 시청했다. 기본적으로 이제 시민들은 보수 진보를 떠나 합리적 사고를 하는 수준에 어느정도 이르른 것 같다는 인상을 받는다. 금식을 하고, 스스로를 맑게 하며 좋았던 점은, 혼탁하여져서 좌우 분간이 안되는 것들에 대한 경계로서 사사로운 유익을 섞지 않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내가 원할지라도 더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고, 내가 원하지 않아도 더 가야하는 길이 있다. 2020년은 나에게 백지로 주어진 시간이 아니다. 현상학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미래는 비어있는 기대지평이 아니다. 미래는 엄연히 존재하며 나에게 접근하고 있다. 그것을 주관하는 자는 낮은 단계에서는 이 세상의 영이며, 높은/총체적인 단계에서는 하나님의 영이다. 말하자면 낮은 단계에 머물면 혼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