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나는 보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나는 말테 브리게처럼 보는 법을 배우는 편이 아니다. 내 시선이 힘적인 것이 아닌 부드러운 어떤 것에 의해 풀려짐을 경험한 이후로부터, 시선의 변경이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시야가 열리는 체험. 역설적으로 그러한 경험은 불안한 자기 존재에 대한 수용에서부터 개시된다. 스스로의 그러함이나 이러저러함에 대해 눈을 감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스탠스 자체가 존재의 허약함을 보여준다. 치달리는 처연함이 강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강함에 대한 사유가 힘과 의지의 층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다. 흩어지는 시간을 끊임없이 끌어모으며 앞을 지향하지만 속절없이 다시 흩어짐을 경험하는 하이데거적 시간의 극복은 힘적인 용기와는 전혀 다른 편에서 기획되어야..
나는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게 금식 중의 나의 고백이다. 사실 금식에의 단행은 사소한 개연성의 틈으로 들어온 우발적 사건에 가까웠다. 지인이 하기로 했(다고 오해했)던 릴레이 금식이 구멍이 나 버려서 그 커다란 공허를 자기가 (뭔데)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건지 또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지금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 영적 씨름하는 것을 고스란히 함께 체험할 때가 종종 있다. 예배를 인도하기 전이나 공동의 예배에 진입해야 할 때는 몸살을 앓듯이 무거운 무력감을 느끼곤 한다. 부단히 씨름하는 것은 그래서 그저 존재하기 위한 발버둥 같은 것이다. 그리고는 조각 조각 부숴져 시간을 하염없이 땅에 게워내며 연명할 때도 많다. 쉼 같은 것도 사실 잘 모르고 어떻게 넘어지지 않고 달려야 하는지도 ..
휘브리스로 가득한 글쓰기를 뉘우치고자 40일간은 이 공간에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매끈한 글 뒤에 교만함이 숨어 있다. 그 공교한 메커니즘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글은 그대로 남겨 둔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그 옷의 이름은 포괄성이다. 나는 북쪽으로 향하는 지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암스테르담에 머물 때도 Noord로 가능한 한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고자 했다. 기차를 탈 수 있다면 꼭 북해를 보러 나아갔고, 프랑스에서도 노르망디에 다다르는 것이 그저 좋았다. 사실 북해 자체는 그다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일상의 기후는 흐리며, 자갈에 차가운 물들이 부딪히는 곳이다. 나는 흐릿하고 복잡한 것이 분명한 패턴을 이루는 순간에 늘 매혹되어 버린다. 내가 북유럽을 가본 적도 없..
몸에서 열이 난다. 춤과 기도가 밥인 지인이 독일까지 오기로 했다, 기도하기 위해서. 그날 꿈에 나는 큰 덤프트럭이 굴러오는 것을 보았다. 몸에서 열이 나지만 열을 뚫고 기도해야 한다. 스스로가 허브hub가 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로 인해 기둥처럼 견고해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기도를 하면서 스스로가 부드러운 이끼 낀 바위 같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래, 그러나 그 씨앗이 제 힘으로 들치기 위해선 들판이 또한 역장Kraftfeld이 되어 주어야 할 테지. 독일의 땅은 토질이 매우 좋아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물을 머금는다고 한다. 그러한 땅에서는 좋은 것들이 많이 난다..
기도를 하는데 선천적인 외로움 같은 것을 상기하게 하시는 때가 있다. 그때 나는 발열하는 필라멘트처럼 울부짖곤 한다. 사역자가 된 이후로 외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하신다. 작은 나를 만나기 위해 동독의 작은 마을까지 찾아온다. 친구가 찾아와 트렁크에서 10키로짜리 쌀을 꺼내 주고 돌아간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무겁고 슬픈 것을 주머니로부터 아주 조금, 꺼내 보이려다 친구는 황급히 떠났다. 아, 차라리 부둥켜 안고 실컷 울기라도 했더라면 창세기 7장에는 의로운 분이 악한 사람들을 쓸어버리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나는 설교를 준비하며 그 무서운 심판 이야기보다, 방주에 초대된 '부정한' 생물들에 더 마음이 갔다. 나는 스스로 부정한 생물 같은 느낌을 가지는 때가 희한하게 많은 편이다. 거절이 중첩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