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아침 기도회가 끝난 후, 사랑하는 지인과 커피를 하면서 우리의 고갈이 단 하나의 결핍에서 말미암은 것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무조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지지. 아내와 지인의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고, 도서관에 가서 도록 같은 것을 보다가 논문 작업을 했다. 한 문단을 쓰고 나니 사고 능력이 멈춰버려서 다시 지인에게 가서 간단한 일을 돕고,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 기도회에 갔다. 마음이 회복되니 연구에 진척이 있다. 논문 작업이 굴러가지 않던 이유는 기대치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동력원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내 동력원은 늘 사랑이었고, 내 주위 사람들도 그러했다. 사랑받는 자는 효율을 내지 못해도 사랑받는 현실에 변함이 없다. 사랑은 거룩한 약속 같아서 사랑하는 자는 효율을 내지만 효율보다는 늘 사랑..
서점에 가서 독일어로 번역된 하루키의 소설들을 보다가 색채를 잃은 다자키가 잃어버린 친구들이 나의 중학생 시절 친구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는 늘 모여 그림을 그리곤 했다. 토끼는 새로운 반에 올라가 낯설어하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친구가 되어준 녀석이다. '너 그림 잘 그리지? 나 다 알아. 우리 친하게 지내자' 그 뒤에 우리는 미술지망생인 돼지와 소를 만났고 동물농장 구락부 같은 모임을 매일 가졌다. 우리는 센스쟁이 토끼에 이끌려 방과 후에 늘 농구를 해야 했고 소는 느리고 덩치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골대 밑에서 나무처럼 늘 팔을 뻗고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키가 작았던 나는 바나나를 던지듯 슈팅을 하는 원숭이였다. 나는 한 선으로 그림을 끝까지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스케치의 복층적인 어프로치..
비로소 논문의 본론을 개시했다. 역사적이다. 게슴츠레 책을 읽으며 귀퉁이를 빼곡히 채우는 것은 쉬웠다. 본론의 첫 문장을 쓰는 것이 거인을 굴려야 하는 것처럼 무겁게 다가왔고 그것을 피해 책 겨드랑이 속에서 너무 우래 웅크리고 있었던 듯 하다. 불안하면 자꾸 소품들은 늘려가지만 큰 가구의 조립은 뒤로 미루는 것과 같다. 단상들은 빼곡한데 그것들을 굴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근래 여러 일들을 처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사이 스스로의 리듬이 망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내부가 단단치 않고 흘러가는 대로 떠밀려서 사는 모양새였다. 나를 바꾼 것은 다름아닌 한 미니멀리스트 경영자의 책이었다. 그의 일화에 나온 한 노승은 가득 채워진 잔에 계속 차를 따르고 있었다. 그것은 비우지 못한 잔에 어떤 것도 채울 수..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보편 은총이라고 부른다.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과거화된) 어떤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칼 바르트는 창조주의 창조를 그래서 완료 시제Perfektform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은 분리될 수 없고 그래서 우리 뒤로 지나가버린 시점이 창조라면 하나님은 오늘이나 내일은 현재하실 수 없는 분이 된다. 하나님의 현재는 하나님의 임재Gegenwart이다. 이 임재는 모든 시공의 근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근원적인 무엇'의 추상이 아니다. 추상은 우리가 규정하는 것 옆에 놓이는 무엇일 뿐이다. 반대로 그 근원이 모든 현존재를 규정한다. 내가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규정하는 것, 그것을 하..
연구소의 프로젝트 중에 Heart of flesh, not a stone이라고 하는 주제가 있다. 오랜 시간 나는 갈등 해결을 머리로 풀려고 했었던 것 같다. 목사이기도 한 나의 지도교수는 나에게 칼 바르트의 화해론은 설교와도 같아서 갈등 해결을 위한 구체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종종 이야기한 바 있다. 상호간의 소통은 서로가 위치한 어쩔 수 없음의 실존성에 대한 인정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함께 열려짐의 어떠한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드러운 마음이 아니고는 도무지 늘 불가능성에 머무르게 된다는 거다. 갈등 속의 두 사람 혹은 집단이 서로를 솔직하게 내어보인다고 할 때, 둘 다 있는 그대로 인정을 받고자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인정 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갈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