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여행이 끝났다. 에너지도 시간도 돈도 다 소진되었다. 벽에 꽂은 아이폰처럼 하루종일 침대에 결속되어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날 두 교회에서 찬양을 하면서 내 안에 줄곧 목말랐던 어떤 것이 가득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환상이라던가 하는 것을 잘 못보는 편인데 바이마르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또는 찬양을 하면서 아름다운 환상을 이따금씩 본다. 아름다운 곡선을 긋는 돔 지붕과 웅장한 제단과 미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한 성전 안에 나는 종종 들어가 있다. 환상은 참으로 현상학적이어서 내가 속한 공간의 방위는 언제나 나로부터 겨누어진다. 영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현존재들로부터 참된 공간이 개시되는 것이다. 단촐한 기도처가 예루살렘과 로마의 성전이 되는 meta-morphosis는 티끌과 같은 인간에게 입혀..
드디어 파리에 왔다. 짧은 이탈리아어를 말하면서 생각보다 프랑스어와 섞이지 않는 것을 보고 인간의 뇌란 참 신기하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막상 말하려 보니 모든 것이 희미해져 있었다. 마르모탕 미술관 티켓을 세 장 주문하려는데 trois personnes가 아니라 tre personnes라고 말해버렸다. trés personnes? 참으로 인간적인? 세느강 옆의 아파트를 숙소로 잡았는데 동네가 너무 차분하고 좋아서 아침에 미술관까지 산보하듯이 걸어갔다. 도착한 첫날 밤에 편의점인monoprix에 가서 비싼 가격에 화들짝 놀라서 물 몇 병만 사들고 돌아왔는데 오늘은 근처에 Lidl이 있는 것을 보고 삼겹살과 새우를 사와서 구워 먹고 커피까지 내렸다. (역시 독일!) 주방이 있으니 아침 저녁을 장을 보고 점심을..
나폴리에서 로마로 향하는 기차에서 라디오헤드 라이브 부틀렉을 오랫만에 꺼내 듣는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차분한 곡들 위주로 듣는 스스로를 본다. 지나치게 울적하거나, 지나치게 광적이어서는 곤란하다. 메트로놈이 좌로나 우로나 요동치는 것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점점 부드럽게 곡선을 그어주는 리듬이 좋아진다. 나와 라디오헤드의 인연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우울감에 허우적대는 룸펜이었고 레코드샵에서 처음 산 라디오헤드 카세트테이프가 ok computer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는 exit music이나 no surprises 같은 곡들이 좋았다. 슬퍼함을 끝까지 몰아갈 수 있는 맹목적인 그 어떠함에 천착하던 세대였고 다음으로 나는 스탠리 던우드가 디자인한 붉은 커버의 amnesiac 테이프를..
... 의식은 단계적으로 자신을 '개별성과 보편성의 직접적 통일체'로 이해할 줄 알게 되며, 이에 상응하여 자기 자신을 '총체성'으로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맥락 속에서 '인정'Anerkennung은 이미 '이념상' 총체성으로 발전한 의식이 '다른 총체성, 즉 타인의 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인지적 단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는 경험을 통해 갈등이나 투쟁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주관적 요구가 손상될 때에만 타자 역시 내 속에서 자신을 '총체성'으로 재인식하는지 어떤지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72) ... 두 텍스트 속에서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은 개인적 의식 형태의 탈중심화라는 의미에서 공동..
equilibrium은 본래 라틴어로서, 평형을 뜻하는 단어이다. equal이라는 말은 동등한, 같은,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여기에 초월성을 뜻하는 접두어인 tran(s)를 붙이면 tranquility, 즉 평정, 고요함, 냉정 등을 의미하는 합성어가 된다. 그러니까 equilibrium은 실재하는 것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어떤 일치점을 지향하고 있다면, tranquility는 그것들의 조화와 균형이 어그러진 상태에서도 태연자약하게 또는 냉정하게 일관된 상태로 진행해가는 의미를 겨누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trans를 초-로 본다면 당연히 위로부터 오는 초월성의 힘으로 느껴질 것이고 어떤 것이 전이하는transitional 상태, 즉 전이적- 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시간과 역사에 대해 횡단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