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어깨가 많이 뭉치고 편도선이 부었다. 의지적으로 도서관에 안가고 집에 돌아왔다. 수요예배를 마치고 목이 간당간당하다 느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쇼트가 온 메인보드처럼 뭔가가 끊어진 것만 같다. 태생적으로 느린 리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어찌하다가 꼭 리듬이 조급하게 엉켜서 몸이 고생한다. 효율보다 사랑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되뇌이면 뭘하나. 다음 주부터 또 한 달간 연구를 멈춰야 하는 일이 생겨서 현재 진행하는 것의 매듭을 짓고자 기어를 올렸었는데 차가 퍼져버린 느낌이다. 내 몸을 다루는 방식은 먼저는 가족을, 다음으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내 몸은 타자로서의 나이다. 내 몸은 나와 협력하는 공간적 체계이다. 내가 조심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나의 고집스러운 장..
프랑스어 수업에 다녀왔다. 5주나 빠졌는데 다행히 여전히 쉬웠다. 지난 주에 논문에 집중하려고 빠지게 되면서 아예 못 갈 각오를 했었는데, 그럼에도 가게 된 경위는 이렇다: 도서관 카페테리아 테라스에서 식사를 하는데 프랑스 가족이 내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커피를 가져오려고 내 가방을 좀 지켜달라고 했고, 다녀와서 merci, 라고 했을 뿐인데, '이 사람 프랑스어를 하네?'라고 서로 말하길래 '네, 아주 조금'이라고 말하면서 대화에 시동이 걸려버렸다. 그들은 리스트 음대에 다니는 아들을 방문하기 위해 Aix-en-Provence(아니 심지어 프로방스)로부터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왔다고 했다. '너 세잔을 아니?' 응, 아주 좋아하지. 대화를 하는데 프랑스어를 향한 신의 윙크 같은 것..
누군가를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하다. 그러나 결코 그 엄정함은 사슬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판단하는 것이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 무거운 긴장을 가지고 그는 몇 보 나가지 못한다. 나를 살리는 것은 나의 의도 죄도 아니요, 들려오는 말씀이다. 리쾨르가 말하였듯, 우리는 광야 한 가운데에서 뒤로 갈 수도 없고 앞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방위의 개념이 무색할 때에는 새벽별을 찾아야 한다. 나의 길은 내부의 기억도, 기대도, 직관도 아니요, 외부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부르심이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그 부르심이 내가 된다.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며, 내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하지도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기호가 아니라, 저편에서..
나는 약했던 걸까, 외로웠던 걸까. 악은 선의 결핍된 상태라는 말이 있는데, 외로웠기 때문에 약하였던 것은 아닐까. 내 주위에는 약하지만 꿋꿋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꿋꿋이, 라고는 하지만 그 터질듯한 고통을 누가 감히 계량할 수 있겠는가. 나이를 불문하고 그렇게 울면서 지긋이 길을 밀고 가는 친구들로부터 나는 꽤 많은 것들을 배우는 중이다. 다 사람이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견디기 힘들면 울며 주저앉게 되는 그런 사람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사람들의 어떤 결기로부터 나는 격려와 사랑이 담긴 음성을 듣는다: '혼자인 것처럼 포기하지 말아라' 나는 약한 나를 짓밟는 수레바퀴 밑에 깔리는 현실성을 당연히 여기며 살아왔다. 약함은 터져서 악함이 되고, 외로움은 응결되어 내 안에 냉혹함 ..
내가 아닌 모습이 되려고 하면 힘이 많이 들어간다. 반대로 내가 가야할 길이면 힘을 꼭 빼신다. 프랑스어반은 이상하게 빠질 일이 꽤 생기고 독일어에 더 집중하게 된다. (덕분에 여행 전에 이탈리아어를 공부할 여력이 생겼다.) 삶의 기름기를 빼는 것은 생각처럼 쉽게 되는 일은 아니다. 취미로 외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게임을 끊고 생산적인 취미를 가지기 위해서였다. 나는 키보드로 격투게임의 타격기 커맨드를 열심히 타건할 수도 있고, 같은 것으로 프랑스어나 이탈리아어의 철자들을 조립할 수도 있다. 선택은 나의 자유에 달려 있고, 나의 원함에 달려 있다. 나의 옛 지인은 내가 강박적으로 게임을 지우(고 까)는 것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었다. '계속 다시 돌아가면서 그런 노력을 왜 해?' 그래, 그럴지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