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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너의 눈빛이 변했다 지난날 너의 불빛은 어두웠으나앞이 안 보이는 가난의 거리도 어두웠으나네 상처 난 마음에는 붉은 꽃이 빛났고네 젖은 눈동자에는 새벽 별이 빛났다 너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네 눈동자는 불타고 있다주식 시세와 아파트 시세를 따라 오르내리는 네 눈빛타인의 시선과 TV 드라마를 따라 늘어져 가는 네 눈빛 네 빛나던 눈동자엔 지금 빛이 없다 맑은 빛을 키우던 네 어둠은 어디로 갔느냐청보리 싹으로 빛나던 네 겨울은 어디로 갔느냐떨리는 손을 맞잡던 네 슬픔은 어디로 갔느냐 너의 눈빛이 변했다
내 말이 네게로 흐르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 말은 입에서 나오는 순간 공중에서 얼어붙는다 허공에 닿자 굳어버리는 거미줄처럼 침묵의 소문만이 무성할 뿐 말의 얼음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따금 봄이 찾아와 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 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아지랑이처럼 물 오른 말이 다른 말을 부르고 있다 부디, 이 소란스러움을 용서하시라
무서운 짐승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짐승을 숨겨주는 무서운 숲이 걷고 있어요 무서운 숲의 포효를 은닉해줄 무서운 새의 비명이 번지고 있어요 그곳에서 해가 느릿느릿 뜨고 있습니다 침엽들이 냉기를 버리고 더 뾰족해져요 비명들은 어떻게 날카로울까요 동그란 비눗방울이 터지기 직전에 나는 어떤 비명을 들었습니다 이 비명이 이 도시를 부식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요 너무 많이 사용한 말들이 실패를 향해 걷습니다 입을 다물 시간도 이미 지나쳐온 것 같아요 숲의 흉터에서는 버섯이 발가락처럼 자라나고 있어요 이 비명과 어딘가 비슷하군요 달이 사라지기 전에 해가 미리 도착합니다 함께할 수 있는 한 악착같이 함께해야 한다는 듯 나무가 뿌리로 걸어와 내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무서운 짐승보다 더 무서워요 무서운 것들은 언제나 발을 ..
난독증에 걸린 시인이 있었다 연약한 다리가 활자들 사이에서 다리를 찾지 못해 행간으로 미끄러질 뿐이었다 책은 이해될 수 없는 말들의 성단이어서 초대받지 못한 외계인처럼 별들 위를 선회비행하며 행간에 끼어 살았다 난독증이 완화된 것은 말을 다시 배우면서부터였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그러나 노역자들은 말이 아닌 바벨탑을 쌓아 올렸고 이제 말은 다리가 아닌 뾰족하게 솟은 가시이다 시인이 혓바늘을 뽑아내지 않으면 페가수스 성운을 뽑아낸대도 말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울한 외계인처럼 그의 행간에만 체류할 것이다
모르스부호는 언제나 너의 바깥에 있다.이를테면 노트북 안의 깜박이는 커서는 무언가 전언할 것을 재촉하는 신호이다. 나와 너의 눈꺼풀의 깜박임은 우리가 건조해졌다는 신호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형광등은 자신의 잔영으로 여전히 깜박깜박 점멸하고 있다.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처럼 이 활발한 형광등도 좀처럼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못한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크서클이 검버섯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른다.밤하늘에 모르스 부호들이 빼곡했던 시절이 있었지, 지금 우리의 세상은 사탕 불빛들로 가득해.24:00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혼미한 의식들 뿐이다. 간혹 명료한 빛을 보더라도 에이, 인공위성이 아닐까.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
나희덕 시인께서 드디어 신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의를 해주셨다.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질문들이 화산의 라바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차마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에 하지 못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 집에 가셔야 하는 교수님과 시인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해버렸다.사실은 시에 대한 컴플렉스 내지는 억압기제가 있었나 보다.그 기원은 나의 지인들에게서, 그리고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동시에 그 세밀한 조탁 능력 때문에 다소 주관이 뚜렷한 작가인 친구에게서 발원하는데, 나의 내면에는 이미 타자의 시선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기 검열작업이 나의 시에 끊임없이 칼질을 해댔던 것이다. 미용실에서 정형화된 팜플렛 속의 헤어 스타일에 국한되어 선택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나는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던 시의 미친 달리기를 버리고 '..
하나님의 사랑은 불타고 있다 줄곧 불타는 것은 진실되다 나의 심령은 곧잘 구부러지는 마른 나무 가장 갈구하는 진실을 진실되지 않게 갈구하는 나의 심령은 태워지길 거부하는 가시덤불 우거진 공동의 묘지 그 불이 고모라를 태우기 전까지 수도원이 아니다
겨울이 깊고 별이 빛나는 밤 날이 찹다, 그래도 먼 데 있는 별이 다 보이고 가난한 동네는 별들이 만개한다
우리는 시끄러움을 찾는다 고요함 중에 다시 찾아올 갈망으로부터의 피난길에 올라 인파 속으로 숨어 군상이 되고자 하는 것도 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덜컹거리는 감각도, 소음도, 옆사람의 얼굴도 지워버리고 공복감만을 느끼는 것이지 그들은 몰두하길 원해, 피로감을 피해, 너도 방심하지 말고, 어서, 스마트폰 속으로 내부의 장기에 청진기를 대는 대신 외부의 장기에 이어폰을 꽂고 제프 버클리를 마주할 엄두가 안나는 것은 이 가수는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진실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지 자, 이리와 어서, 바보같은 소리는, 치우고 신나는 노래나 같이 듣자고 진통제와, 할렐루야, 스마트폰과,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