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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아르페지오의 행간으로 귀뚜라미가 들어와 운다 나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고 싶다 손에 여전히 구멍이 나 있을 그사람처럼 아픔으로 큰 여백을 만들어 누군가의 연약을 쉬게 하는 빈 공간이 되어주고 싶다 오후 8:44 귀뚜라미와 함께 아르페지오를 치다가
구름의 출처는 지구 곳곳에서부터이다 때때로 그것은 북극의 녹아내린 유빙 한조각이었을 수도 있겠고 서울 하수도의 수분이었을 수도 있다 요즈음 유난히 가문 비를 보며 토고의 까까머리 아이의 수분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많이 흘렸던 눈물이 그 동네에 지나가던 그늘이 되어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모르스 부호를 본다 모든 현상 안에는 모르스 부호가 있다 이를테면 문서 안의 깜박이는 커서는 무언가 전언할 것을 재촉하는 신호이고 나와 너의 눈꺼풀의 깜박임은 우리가 건조하다는 신호이다 불 꺼진 방 안에 형광등은 자신의 잔영으로 여전히 불안한 깜박임을 지속하고 있다 나는 재즈 피아니스트의 건반을 떠올린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처럼 이 깜박이는 형광등도 좀처럼 수면 밑으로 가라앉지 못한다 그의 관자놀이에 다크서클이 검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천정 너머에는 모르스 부호들이 가득했던 시절이 있었다 해변의 모래처럼 쏟아진 밀크처럼 가득했던 때가, 지금은 우리의 세상은 사탕같은 불빛들로 가득하다 밤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한 흐려진 의식들이 깜박, 깜박 잊혀진다 형광등의 다크서클처럼, 깜박, 깜박 전언할 것을 ..
비가 내리면 박수치는 소리가 들린다 손 한 뼘 다른 한 뼘이 만나 소리를 만들듯 비가 내리는 시간은 하늘 한 뼘 땅 한 뼘이 만나 박수를 치는 시간이다 땅은 원래 하늘의 다른 한 뼘이라는데 그 뼘이 지저분할 때가 참 많아 이다지도 비가 내리는가 보다 그런데 이상하지, 관중이라도 있는지 다른 그 한 뼘 씻기우는 때마다 박수갈채 소리가 하늘에 땅에 가득하다
책장의 공동 책장에서 양장본 시선집을 꺼내 선 채로 시를 읽었다 1920년부터 2000년까지 페이버릿인 시인들을 골라 읽고 다시 집어넣으려는 순간 끝 페이지에 있던 문제풀이가 페이지 밖으로 튀어나온다 '제 8연에서 시인이 부끄러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시인이 부끄러워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시를 읽었나 싶어 당혹스럽기도 하고 8연의 시를 7연처럼 읽어놓고 시집을 반으로 접어놓는 일이 많아 시집 하나가 빠진 공동 사이로 손을 넣고 한참을 우두커니 있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어렵다. 시를 포기하고, 쓰기를 수없이 반복해 왔지만 결국 결론은 정직하게 시를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내 시에 대한 부정의 소리를 항상 들어왔다. (이 타성은 언제나 우리를 시로부터 우회하게 한다) 하지만 너는 변명할 수 없다. 사람들이 너에게 에세이를 잘 쓴다, 단편을 잘 쓴다, 에세이를 써라, 단편을 써라, 말한다 해서, 그리고 시를 잘 쓴다, 시를 써라, 라고 말하지 않는다 해서, 네가 시로부터 도망한 것을 변명할 수는 없다. 좀 더 고통스러워져봐라, 좀 더 감내해봐라, 좀 더 끈질겨보고, 좀 더 섬세를 향한 박피작업을 견뎌봐라. 시는 정직한 자의 것이다. 시는 진실을 외치고 말하고 선포하고 노래하고 싶어한다. 너는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알고는 있다. 너의 안에 시가 있으며,..
방바닥에 엎드러져 장농 밑을 보는 일이 간혹 있다 백사장처럼 널려있는 먼지 너머 침침한 바다가 웅크리고 있다 난파된 것들을 품에 안고서 장농의 깊이와 난파의 연대기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하나의 뒤틀린 지각판을 보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게처럼 납작해질 때 나는 비로소 장농 밑을 보게 된다
주위의 소음에 대항해 두 귀에 손가락을 우겨넣는다 비행기체 안에서 듣는 것처럼 외부로부터 기류의 소음이 소용돌이쳤다 내륙으로부터 depature하자 얼기설기 복잡한 도로와 거대한 입방체 건물이 반도체 칩처럼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도 건물도 바다도 보였다, 작은 것이
H코드가 있어? 그럼, 이것은 순환계를 이탈한 한 화음 G와 A 사이 쥐샵과 에이플랫의 접점에서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 진원지를 두는 설령 다른 어떤 즉흥적인 친구들이 부지중에 그 소리를 가깝게 지나가긴 했어도 한번도 의식적으로 닿은 적이 없고 담겨지지 않았던 일단 H로 들어가면 이어지는 알파벳들처럼 그 뒤로 음계들이 쏟아져 구르고 색에서 빛으로 개념이 넘어가듯 습관적인 도식이 깨지고 나서야 만져지는 H코드는 헤븐리Heavenly코드이며 하이어Higher코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