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사랑 (23)
저녁의 꼴라쥬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 이 두려움은 율법에서 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질식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가능성도 함께 박탈시킨다.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으려 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오히려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죄 아래 팔리는 것을 본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면 더더욱 그 죄를 피하면서도 그 죄 아래 팔리게 되는 모순의 존재가 인간이다. 로마서 8장의 대전환처럼 우리에게는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하는 것이 생명을 향한 열쇠가 되어준다. 항복은 7장까지의 흐름처럼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이 아니라 '뼛 속까지 더러운' 죄인이며 그 모든 실행되지 않은 죄가 이미 가능태로서 내 안에 죄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살인이 내 안에..
우리는 죄를 이기고 싶어서, 의지를 사용한 나머지 경직이 될 때가 있다. 이때에 사용한 의지는 데이비드 베너가 지적하듯, "사랑을 앞선 의지"이며, 내 마음을 질식시키는 의지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또한 위험의 도랑을 본다. 우리가 갈망이라고 말하는 것이, 제랄드 메이가 말한 것처럼 "정화된" 갈망이 아니라면, 갈망만을 주장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주장이라는 표현을 썼다. 주장한다는 것은, 바울이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표현하듯이, "내 뜻대로 되고자 하는 기대"이다. 내 뜻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하고, 내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바램은 기대이다. 우리는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풀어주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풀어준다. ..
우리는 시끄러움을 찾는다 고요함 중에 다시 찾아올 갈망으로부터의 피난길에 올라 인파 속으로 숨어 군상이 되고자 하는 것도 내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 때문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진통제, 할렐루야, 스마트폰, 페이스북 덜컹거리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덜컹거리는 감각도, 소음도, 옆사람의 얼굴도 지워버리고 공복감만을 느끼는 것이지 그들은 몰두하길 원해, 피로감을 피해, 너도 방심하지 말고, 어서, 스마트폰 속으로 내부의 장기에 청진기를 대는 대신 외부의 장기에 이어폰을 꽂고 제프 버클리를 마주할 엄두가 안나는 것은 이 가수는 사랑에 대해 지나치게 진실되고 고통스러워하기 때문이지 자, 이리와 어서, 바보같은 소리는, 치우고 신나는 노래나 같이 듣자고 진통제와, 할렐루야, 스마트폰과, 페이스북..
길을 걷다 풋, 웃음이 나온다. 하나님은 참으로 유머러스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숨바꼭질을 즐겨 하신다. 그분 자신이 숨는 것도 즐겨 하시고,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찾아 내는 것도 즐겨 하신다. 그는 우리의 삶에 참으로 많은, 다양한 선물들을 주셨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데도, 두려움과 염려, 방어기제가 그러한 것들을 '받지 않는 안정권'으로 우리를 숨긴다. 나는 그러한 순간들마다 내 영혼에 어스름이 지는 것을 느낀다. 점점 '받지 않고' '주지도 않는' 안정권에 나를 밀어넣을 수록, 내 지각은 매우 협소해진다. 때로는 중간에 낄 때도 있는데, 이야말로 인간이 생각하는 연약한 갈대라는 우스꽝스러운 진리를 드러내는 순간이다. 우리는 받는 것도 아니고, 안 받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중간 지대에..
"성령을 따라 행한다"라는 것이 단순하게 그때그때 즉흥적인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 된다면 이 또한 반쪽짜리 진리가 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 다음 스텝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도면밀해야 함을, 오히려 그 근신과 절제에 대해서 민감한 계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한다면 나의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안에서 우리는 교모하게 획책을 꾀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로 시작하였다가 자꾸만 스스로의 의로 변질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자꾸만 못을 빼고 내려오는 것은 이러한 ..
내가 어떤 선함을 행하고 난 뒤에 전에라면 외롭다고 난리를 피웠을 것이다. 왜냐면 내 의지로 내 자아를 죽이려 했으니까. 모든 사람은 위로를 필요로 하고 용납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도 그러하다. 그러나 입만 벌리고 있어서는 누군가 나를 찾아오지 않는다. 결국 내 쪽에서 찾아가고 위로하고 안아줘야 한다. 그렇게 되면 이쯤에서 자아의 질문이 시작될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의지로 이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했다면: 나는 누가 위로할 것인가? 그렇다면 누가 나를 위로할 것인가? 내가 사람들의 연약을 품을 때, 나는 강해야 하는 것인가? 나의 이 연약은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굴 속으로 들어가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여, 사랑하는 나여,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죽이며 이러한 일을 ..
백금같이 명징하던 해가 호박죽처럼 초라해지는 시간 왕자가 거지가 되고 늑대가 개가 되며 나약해지고, 깨지고, 부들거리며, 우울하고, 어둡고, 괴로워지며, 쥐어짜는 시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심장처럼 곤죽이 되고, 과부하가 걸린 노트북처럼 버벅이고, 방금 꺼진 형광등처럼 놀란 맥박들이 어리둥절하고, 조용한 확신으로 기쁨의 칸타타를 흘려보내던 정원이, 시끄럽도록 슬픈 혼혈아들의 뉴올리안즈 재즈 놀이터로 변한다 윤곽이 흐릿함에도 질료는 그대로 있고 각자가 차지한 공간도 침노당하지 않았으나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 세계는 비로소 벌거벗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둠 속으로 당신의 조각들을 넘겨주기 전에, 아직 점멸하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처럼 의식과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 윤곽선과 흐릿함이 동시에 살아 있는..
온 바다를 말려 소금을 만들듯 나도 자유를 내놓아 작은 결정結晶이 되고 싶다 오래 작열하는 태양 아래 청순한 소금이 되어 모든 썩음의 품 속에 들어가 대신 썩어 생기를 주고 모든 밍숭맹숭함 속에 들어가 대신 죽어 맛을 주는 그런 작은 결정決定이 되고 싶다 눈물을 말리면 소금이 된다 소금이 녹으면 눈물이 된다
나는 사실 노래에 있어서 표정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전무했던 사람이다. 톰 요크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할 때마다 양쪽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흐느끼는 것이 정서표현에 있어 굉장한 진정성이 있다는 것을 그의 라이브를 보면서 비로소 숙고해보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에 찬양인도를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항상 활짝 웃는 얼굴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지인이었던 성악 출신 자매가 예배가 끝나고 "표정은 발성에 있어서 굉장한 도움이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활짝 웃는 얼굴은 기쁨을 표현하고, 큰 소리와 열린 음을 내기에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표정이 발성의 확성기 역할을 해주는 것이리라. 나는 톰 요크의 표정이 이를테면 온갖 비애와 멜랑꼴리함, 냉소와 비판의 믹스츄어에 대한 훌륭한 증폭기 역할을 ..
그러므로 두가지 자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말 모든 것에 대한 자유, 성령은 이 억압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역사한다. 이 자유에 놓여질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질문한다: 무엇이 나에게 방향성을 제공하는가? 나는 이 자율성을 가지고 어떤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자의성이라기 보다는 의문이다. 그는 말씀 안에서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그를 자유케 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의지도 없다. 여기에서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접점을 오직 성령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대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