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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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알렉스

jo_nghyuk 2009. 11. 27.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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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알렉스 얘기를 하려고 한다. 알렉스는, 암스테르담 동쪽 근교 (두 정거장 떨어진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한 Kadijksplein (plein이 붙으면 광장이라는 말이 된다. Museumplein은 미술관 광장, Rembrandtplein은 렘브란트 광장인데, Kadijksplein의 면적을 보면 아, 네덜란드 사람들은 약간만 공터가 있어도 plein을 붙이는구나 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에서 만난 베트남계 네덜란드인이었다. 부모는 베트남의 수도승의 가문이며 자신은 장남이라, 그곳에 돌아가면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수도승(monk라고 했다)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고 지금도 그러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알렉스는 매우 착한 친구였다. Kadijksplein은 다름아닌 내가 머무는 베이스 바로 앞 공터인데, 우리는 월요일과 금요일마다 노숙인들을 위해 거리에서 찬양을 하고, 빵과 커피를 대접하고, 그들과 따뜻한 대화를 새벽 한시까지 나누고 들어오곤 했다. 거리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웃에 대한 에티켓으로, 9시가 지나면 조용한 찬양을 하거나, 기타를 가방에 집어넣었다. 언젠가 9시가 지나 어스름도 지고 (여름에는 9시 반에 해가 졌다. 나는 노르웨이에서 온 할머니에게 북유럽은 대단하군요, 라고 하자 할머니는 자신의 동네는 해가 11시에 진다고 자랑아닌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를 암스테르담에 온지 며칠만인 어느날 소심하게 몇 블럭 산책하며 도중 여로에서 만났는데, 그녀는 Kadijksplein 베이스에서 나를 봤다며 호의적으로 자신은 노르웨이 베이스에서 왔으며 내가 원하면 이 동네를 소개시켜주겠다고 해서 나와 함께 있던 동행인은 베이스로 돌아가고 나는 그녀와 한두시간 정도 암스테르담 구석구석-이 날 동물원은 어디에 있으며, 풍차는 어디에 있는지 배웠다-돌아다닌 후 베이스로 돌아왔고, 우리는 세시간 정도 더 얘기를 나누었는데 주제는 암스테르담의 볼거리들-그녀는 수 개나 되는 팜플렛과 지도 그리고 도시 볼거리pass카드를 내게 친절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하나도 주진 않았다. 대신 이상하게 쓴 북유럽인들이 좋아하는 검은 젤리를 주었다. 하나 더 먹을래? 아니요. 이 날 내 방에 돌아왔는데 기분이 매우 좋았다. 좋은 노르웨이 친구를 만든 것이다. 할머니이지만. 훗날 나는 핀란드 친구도 많이 사귀어서 북유럽 친구가 부쩍 늘어서 든든한 기분이었다. 일단, 그리로 가면 맞아줄 친구들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제 괄호를 닫자. 가지가 많다.) 아무튼 어스름도 지고 조용히 기타줄을 퉁기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성룡과 이연걸을 반씩 섞어놓은듯한 페이스의 아시아계 청년이 Hey,라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매주 금요일 밤마다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검은 장발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내린 헤비메탈을 좋아하는 회사원이었다. 나는 힘이 들어서 월요일에는 별로 나가지 못했다. 알렉스는 월요일과 금요일마다 암스테르담 Bibliotheek(앞서 내가 말했던 애플 스토어를 닮은 7층 건물의 대형 시립도서관)에서 자신의 전공인 엔지니어링 공부를 하고 어스름이 지면 (어스름이라고 해도 9시다.) 알렉스는 보통 9시에서 10시 사이에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는 점차 절친이 되어갔고 우리는 이제 만나면 허그hug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알렉스나 나나 게이가 아니다.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전에 스페인에서 온 나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다니엘과 어깨동무를 하고 (어깨동무라고 하지만 키를 감안하면 내 머리는 그의 가슴 옆에서 겨드랑이를 끼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도심을 지나다니다가 지나가는 시민들의 찌푸린 시선을 당시에는 왜인지 알지 못하다가 몇십걸음 더 나아가서야 이곳은 암스테르담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적도 있다. 또 한번은 이곳에서 남자는 핑크계열의 셔츠를 입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그얘기를 듣고 가져온 예쁜 핑크셔츠를 한동안 캐리어에서 꺼내보지도 못했었다. 아무튼 이곳은 그런 곳이라고.

 델프트와 헤이그를 여행 다녀온 어떤 날 밤 나는 베이스 앞에 있는 더비(Derby라고 하는 스낵바)에서 콜라와 Patat(네덜란드식 후렌치후라이. KFC 후라이 세네겹은 합쳐놓은 굵기로, 마요네즈나 케쳡, 혹은 땅콩버터와 마요네즈나 마요네즈에 잘게 썬 양파를 얹어 소스로 먹기도 한다. 네덜란드에서 못해도 20회 30회는 먹었던 것 같다.)를 사서 베이스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저편에서 (도서관 방향) 알렉스가 걸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우정의 허깅을 한번 다시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문득 알렉스는 자신의 차가 있으니 도심을 구경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그건 알렉스 회사 차였는데 하얀색 이인승 차였고 뒤에는 엔지니어링을 위한 물품 수납공간으로 좌석이 없었고 앞좌석에는 IRON MAIDEN이나 북유럽 헤비메탈 그룹의 씨디가 몇장 있었고 비스켓이 뜯지 않은채 있었다. 알렉스는 어린 시절부터 일렉기타를 치며 고등학교 밴드부 활동까지 할 정도로 헤비메탈의 열성 매니아였다. 물론 수년동안 기타를 치지 못해서 더이상 손가락들은 타란큘러 거미처럼 재빠르게 프랫 위를 기어다니지 못하고 그의 기타는 거실 벽에 8년 째 걸려있지만. 알렉스는 나에게 음악을 틀어도 되겠냐고 물어본다. 물론이지, 그는 조심스럽게 제일 스무드한 헤비메탈 그룹 (이 단어자체도 참 모순적이다) 을 찾아 씨디를 넣었다. 노르웨이인지 핀란드의 밴드였는데 여성 보컬이 매우 부드럽고 연주는 강한 음악이었다.
알렉스는 Amstel강에서부터 Heineken 맥주공장, Prinsengracht, Keisergracht, Herengracht (다 운하의 이름이다. 왕자운하, 황제운하, 군주운하라고 생각하면 된다. 순서는 헤렌그라흐가 케저그라흐보다 먼저여서 계급 순이 아니냐고 물어봤지만 그도 모른다 했다.) 운하들을 지그재그로 지나고 렘브란트 광장, 미술관 광장등을 구경시켜주었다. 짖굳은 알렉스는 홍등가 옆도 얼핏 지나갔는데 나는 눈을 가리고 나를 고문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알렉스, 넌 수도승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알렉스는 이곳에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적절한 자기통제를 중시하는 유형이었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동정이 컸다. 주말이면 가끔씩 하드록 클럽에 가서 친구를 사귀거나 노숙인들이 모여드는 월요일 금요일때면 광장에 나와 자신의 외로움과 그들의 외로움을 함께 달래곤 하는 친구였다. 나는 알렉스가 매우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점차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암스테르담 밤도깨비 드라이브 투어를 끝내고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Uitrecht으로 향했다. 나는 여행가이드에서 위트레흐트 대학이 유명하다는 것을 보고 그에게 위트레흐트, 위트레흐트라고 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십여분의 실랑이 끝에 표지판을 보고서야 그는 아, 유트렛! 이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지금도 왜 우리가 이날 밤 유트렛에 갔는지 모르겠다. 그때는 한밤이라고 하기에도 늦은 새벽이었고 시계는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알렉스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Iron maiden의 씨디를 틀었다. 밤밤밤밤! A WHOLE NEW WORLD! 알 수 없는 가사를 절규하듯 외치는 보컬 소리가 알렉스가 차 속도를 높일 때마다 커졌다. 알렉스는 자신의 차 속도가 빨라지면 음악의 볼륨도 함께 올라가는 시스템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밤의 암스테르담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오른편으로 Ajax 홈구장인 Amsterdam ArenA Stadium이 보였다. 유트렛은 여기서 꽤 멀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우리가 시속 140까지 밟으면서 달렸는데도 도착하는데 꽤 걸렸던 것이다. (물론 나의 만류로 평균 시속 90에서 100정도를 유지했다. 알렉스! 무서워! 아이언 메이든 보컬이 너무 크다고!) 한시간 20분여 지나자 유트렛이 보였다. 자, 이제 시내로 들어가볼까, 하지만 알렉스는 말했다. 이제 돌아가자. 뭐라고? 생각해보니 한밤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시속 140 분량의 볼륨크기로 아이언 메이든을 들으며 돌아왔다. (참고로 나는 헤비메탈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특별히 그것이 시끄러워서이다.) 돌아와보니 시계는 3시 반이었고 알렉스는 내일 교회에 나갈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나와 허깅을 하고 헤어졌다.


2
그 다음주 나는 알렉스를 인터내셔널 처치에 데려갔다. 알렉스는 중앙역 건너편에 있는 박물관처럼 크고 오래된 Kerk(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그 교회는 거의 카톨릭 형식의 예배를 드리는 엄숙하고 차가운 공기를 품고 있는 건물이었다. 주중에는 여행객들이 방문하고 사진을 찍고 헌금으로 입장료를 대신하는 그러한 교회였다. 나는 기타를 좋아하는 알렉스를 위해 좀 새로운 교회를 소개시켜주고 싶었다. 그래서 요스트가 다니는 이 지하에 있는 록 클럽 카페 형식의 교회에 데리고 간 것이다. 우리는 티 타임을 가졌다. 이 교회는 예배 전후에 티 타임을 가지며 서로 교제를 하는 시간을 둔다. 티 타임에는 찬양이 아니라, 그냥 락 뮤직이 흐른다.
저번에는 라디오헤드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정말 의아하고 신기해한 적이 있었다. 아, 새롭다. 라는 느낌이었다. 알렉스는 신사적이지만 그가 있는 환경이나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거의 야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교회에 와서도 거침이 없고 활달했다. 나서거나 나대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는 웃으면서 자신의 많은 얘기-거의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교회의 어떤 청년이 말을 걸었다가 조심스럽게 화제를 마무리하고 떠났고 두번째는 교회 목사의 부인이 (아무래도 여성이어서 더 조심스러운 면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가 계속되는 알렉스의 넋두리에 한참 뒤에 미안해하며 애기를 봐야 한다며 자리를 떠났다. 교제라는 것이 이렇게 피상적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교회인데도. 서로 다름이, 여기서는 다시 계층으로서 드러나고 단절을 교묘하게 피해가며 그저 웃으며 대화하고 매주 지나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나는 기분이 우울해졌다. 사실 이곳은 거의 백인 교회와 가까웠던 것이다. 주언어는 영어에, 영어를 하는 네덜란드인과 영어를 하는 미국인과 영국인 그리고 아시안과 유럽인들이 있는 교회인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런게 아닌데, 하는 아쉬움이 들 때, 요스트가 교회에 들어왔다. 그는 알렉스를 보자마자 Hello라고 했고 알렉스는 자신이 대화중이어서 요스트에게 Hi, 인사만 하고 다른 상대와 또 넋두리에 여념이 없었다. 요스트는 대화의 끝까지 기다린 뒤 나의 소개를 받아 알렉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은, 요스트는 진지하게 이 베트남계 네덜란드인의 넋두리를 몇십분이고 서서 커피를 권하며 경청하고 의견을 내놓는 것이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는 알렉스를 데리고 함께 도서관으로 갔다. 나는 배가 고파 라운지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알렉스는 외식은 비싸서 하지 않으며 집에 가서 먹겠다며 4층 애플 컴퓨터 앞에서 체스게임을 했다. 나는 비둘기와 혈전을 벌이며 식사를 했고 알렉스는 5명의 상대와 함께 체스를 하고 있었다. 체스의 기다리는 시간이 긴 것을 감안해 그는 다섯개의 창을 띄워놓고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알렉스가 나를 보자 빙긋, 웃어 보인다. 이 외로운 친구에게선 어떤 경계심도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는 말했다. 너희 나라가 월드컵에 나가서 4강에 진출했을 때, 우리 나라 (베트남)에서도 아시안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함께 가졌었다고. 문득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이 아닌 아시아계인들에 대하여 어떤 계층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알렉스에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너는 정말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우리는 또다시 뜨거운 허깅을 하고 땅거미가 모든 경계를 부수는 저녁 헤어졌다. 나는 아직도 내 fender 기타 프렛 위를 잠시 기어다녔던 알렉스의 손가락 거미를 생각한다. "니 기타 잠시 쳐봐도 되니?" 그럼, 물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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