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52)
저녁의 꼴라쥬
기차에서 내내 숨이 차올랐다. 숨이 차오른다는 것은 가속이 붙은 바쁜 호흡에 몸이 동기화를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하다. 숨이 많은데 숨이 부족하다. 이상하다. 이전의 집은 미니멀리즘의 공간 여백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는 집에는 짐이 많다. 쌓여있는 물건들은 서로서로 덕지덕지 달라붙어 경계가 없는 하나의 집합명사인 짐이 되어버린다. 물건이 많아질수록 공간이 줄어든다. 잘 쓰는 물건은 공간을 창출하고 구성한다. 쓰지 않는 물건은 공간을 빨아들이고 혼탁하게 만든다. 지인이 기차 역에 마중을 나와주었다. 트램을 타고 기숙사에 가려는데 반대방향으로 타버렸다. 더 좋았다. 어디를 향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버리고 싶어서 나는 이 먼 도시까지 온 것이다. 한식당에는 중국인과 독일인으로 가득했다. 무알콜 맥주..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강변을 걷고 공항에 지인을 배웅하고 다시 지인이 있는 도시로 향하는 중이다. 도시에서 도시로 향하는 여정이 참 오랜만이다. 다른 지역에서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얼마만인가. 내일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도서관에서 현상학 자료들을 숨죽이며 찾아보고 다시 강변을 걷고 다시 커피를 마실 것이다. 부스터 샷을 맞은 후에 백신의 부작용인지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다. 사람이 많은 곳을 가거나 피곤하거나 또는 스트레스가 많으면 더욱 빈번하게 숨이 차오른다. 헤겔 수업을 들으면 너무나 즐겁다가도 한편으로는 머리 속의 팬소음이 비행기 이륙소리에 가까운 듯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뜨겁게 달궈진 삶의 메인보드에 냉각팬 역할을 해주는 것을 찾을 수..
휘브리스로 가득한 글쓰기를 뉘우치고자 40일간은 이 공간에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매끈한 글 뒤에 교만함이 숨어 있다. 그 공교한 메커니즘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 글은 그대로 남겨 둔다. 스스로에게 잘 맞는 옷을 입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그 옷의 이름은 포괄성이다. 나는 북쪽으로 향하는 지향성이 강한 사람이다. 암스테르담에 머물 때도 Noord로 가능한 한 페달을 밟으며 올라가고자 했다. 기차를 탈 수 있다면 꼭 북해를 보러 나아갔고, 프랑스에서도 노르망디에 다다르는 것이 그저 좋았다. 사실 북해 자체는 그다지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일상의 기후는 흐리며, 자갈에 차가운 물들이 부딪히는 곳이다. 나는 흐릿하고 복잡한 것이 분명한 패턴을 이루는 순간에 늘 매혹되어 버린다. 내가 북유럽을 가본 적도 없..
뽀송한 가지들 만개하지는 않는 꽃들 아직은 그래도 봄은 환하게 약한 것들을 격려한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오늘도 반보씩 앞으로 간다
불꺼진 방 나는 아직 눈을 뜨고 있다 전파를 찾는 티비처럼 웅성거리는 수억의 빛의 파편들 유년기에 어머니가 방의 불을 끄면 묻곤 했다 이게 뭐죠 아직도 내 눈에 뭐가 보이는걸요 하얗고 작은 것들이 천정에서 우글우글거려요 주파수가 어슴푸레 잡힌 라디오처럼 어머니는 잠결에 말했다 얘야 그건 네 생일이란다 내 생일이요? 내가 태어나던 날 빛과 어둠이 씨름하던가요 오래된 전축처럼 흐릿함 중에 선명한게 나오던가요 뽀송해지는 봄 가지들처럼 그렇게 눈물겹게 반갑던가요 나라는 것이
오늘은 도서관에서 연구를 하다가 Mensa am Park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지긋이 혼자 거니는데 해가 구름에서 나올때 나도 모르게 '아아'하며 무심코 소리가 나온다. 나무에서 움이 트고 순이 나는 것을 보았고, 공원 길을 따라서 산책하듯 멘자로 향했다. 파스타를 시키고, 샐러드로 올리브, 파프리카, 토마토, 피넛, 참치등을 담아왔는데 3유로가 조금 넘는 가격이 나왔다. 담백한 기분이 들었달까, 무튼 차분히 식사를 마치고 다시 공원 길을 따라 내려와 흐르는 강을 멍하니 바라보고 지근거리에 있는 도서관의 카페테리아에 고양이처럼 숨어들어가 온화한 할머니에게 커피 한 잔을 받아 홀짝거리며 창 밖을 보니 햇살 아래서 연인이 포옹을 하고 있다. 잘 조성된 공원 안을 거닐때면 나는 최초의 행복감을 느꼈던 ..
지인과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무심코 책상을 스윽 쓰다듬는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커피 잔을 감싸쥐는 습관은 언제부터였을까? 잔 자체의 온도가 아니라, 뜨거운 무엇을 쥐고 있다는 데서 나는 묘한 위안을 얻는다. 나의 유년기는 서러운 겨울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차디찬 방바닥 위의 얼어붙은 개구리처럼 꼼짝을 못하고 수일을 버티다가, 횡단보도 건너 주유소에 기름통을 들고 가서 반정도 담아오면 그것으로 며칠을 버티곤 했다. 하도 기름을 오랫동안 넣지 않아 보일러가 망가진 날에도 내 기억에 아버지는 낙천적이셨다. 어두운 날에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훗날 군에서 죽음 한발짝 옆에 살아가면서 깨달았다. 서러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올 때면, 이상하게 저편에서 꼭 설레임의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르곤 했다..
독일 사람들은 참으로 근면하다. 나는 6시가 되면 눈을 뜨는 편인데 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노라면 창문 너머에서 새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런데 이 새 소리 이전에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 위층에 계시는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용하시는 물소리이다. 오늘은 10시에 침대 커버와 베개 커버, 의자 시트등을 바구니에 넣어드리기로 했는데 이미 9시 40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방문 앞에 와 계셨다. 시트 교체하는 법을 알려 주시려고 방 안에 들어오셨는데, 아차,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 방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음을, 아니 그보다 정돈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다니. 한국에서 가져온 짐은 각자 캐리어 하나에 이민가방 하나씩이었는데 우리 부부는 이제 미니멀라이프다 하고 자족하는 마음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지 ..
인류는 작은 공 위에서 자고 일어나고 그리고 일하며 때로는 화성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화성인은 작은 공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혹은 네리리 하고 키르르 하고 하라라 하고 있는지) 그러나 때때로 지구에 친구를 갖고 싶어 하기도 한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만유인력이란 서로를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따라서 모두는 서로를 원한다 우주는 점점 팽창해간다 따라서 모두는 불안하다 이십억 광년의 고독에 나는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현대인, 특별히 도시인에게 사유가 결핍된 원인은 사유할 공간이 없어서이다. 자연의 부재이기도 하고, 비언어적인 감각을 배양할 장소의 부재이기도 하며, 세계 안의 오솔길을 단독자로서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자기만의 방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만의 넓은 장소는 없다. 모든 공원과 숲은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너에겐 자연의 움직임보다 온갖 기계들의, 기계적인 지나친 움직임들이 부딪히는 그곳이 공간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그러나 그곳은 공간이라 할 수 없다. 그곳에서 너는 모든 타자들을 기계적인 비존재로 인식한다. 이방인은 너에게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세계 밖' 존재로 여겨진다. 너는 타자들을 그곳으로 몰아낸다. 너조차도 철저히 생명의 리듬이 아니라 기계의 리듬에 프로그램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