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지금의 조리개 값 (21)
저녁의 꼴라쥬
일어나보니 5시 반이었다. 이상도 하지. 알람도 없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버스를 탔을 때가 7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다. 종점에서 종점. 긴린 샤코 마에 (차고 앞)에서 아라시야마까지의 거리가 마치 월계동에서 역삼역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아라시야마 마에 (아라시야마 전)에서 내린 나는 조금 더 걸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먼저 도게츠 교를 찾아 갔다. 도게츠 교는 달이 건너는 다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멀찌감치 다리가 보이니 안심이 됐다. 아침 일찍이라 상점들은 전부 닫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홍콩에 스탑오버를 했을 때가 생각이 났다. 유럽에서 날아와 이른 아침 도착한 아내와 나는 가장 홍콩의 중심가라고 불리우는 셩원에 갔지만 과일 야채 가게를 제외하고 모두 닫혀 있는 건물을 보고 적잖..
오랫만이었다. 최근에 궁에 언제 갔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남산 한옥마을에 요스트와 같이 갔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처마 밑에 앉아서 말없이 회색 풍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요스트에게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의 색은 어쩌면 이런 날씨에 더 깊이가 있어, 채도는 떨어지지만 깊이는 더 해. 나는 그게 한국의 색이라고 생각해'요스트는 어느 정도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2년 전 우리는 암스테르담 시립 도서관으로부터 강 너머의 풍광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2년을 두고 우리는 다시 풍광에 대한 서로의 시선을 주고 받았다고 할 수 있다.고향을 보는 나, 타국을 보는 친구.여행을 끝내고, 고향에 돌아오면 스스로의 각막이 낯설어져 있음을 느낀다...
사실 숙소의 도미토리의 문을 열기 전만 해도, 이번 여행이 고독과 살결을 맞대고 하는 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서른 살이 되도록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고독을 대면할 줄 알았는가 생각해본다. 방학이 나에게 혼자가 되는 시간을 줄 때마다 나는 그 고독의 생경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친구에게 급히 연락을 해서 혼자가 되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나는 특히 한국 사람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떻게든 모임을 만들든지 그 안에 편입되든지 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외국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선용하지 못하고 바로 공동체가 주는 안정감과 그것을 교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주일 사역이 끝나고 나서 ..
8년 전의 일이었다. 작은 방의 문을 잠가놓고 친구와 둘이서 The Bends를 한껏 목놓아 부르던 시절이었다. 2012년에는 드디어 라디오헤드가 인천공항에 발을 딛었지만 2004년의 우리들로서는 글라스톤베리 실황을 풀타임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Fake plastic trees를 들으며 눈물을 짜던 룸펜 두 명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라디오헤드 일본 투어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친구는 깡패같은 사장이 경영하는 노래방에서 심야시간에 혹사를 당했고 나는 편의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했다. 오사카의 인텍스 홀. 스탠딩의 맨 앞자리에 있었다. 언제나 There there가 셋 리스트의 선봉에 서는 것이 암묵적 관례였으므로 우리는 세 명의 북소리를 기대했다. 편의점에서도, 심야의 노래방에서도, 우리는 서..
하네다 공항은 네 번째이고 동경은 두 번째이다. 하네다에 처음 발을 디딘 때는 미국으로 가면서 환승할 때였다. 아마도 나는 환승을 하면서 이곳 비행기가 보이는 게이트 앞에서 소유라멘을 먹었던 것 같다. 편의점 라면같은 면발과 국물에 적잖이 실망했었던 기억이 난다. 홋카이도로 갈 때도 이곳을 경유해 갔었는데 그때는 사역을 위해 갔던 차라 인원과 짐 관리에 여념이 없어서 그다지 추억이 없다. 기억나는 것은 커다란 로비와 큰 광고판들. 화장품과 여자 연예인이었는데 어떤 것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에는 네 차례 방문했었다. 후쿠오카를 가장 먼저 방문했었고 군 입대 전 친구와 교토에 갔었다. 라디오헤드 공연을 보러 간 여행이었는데, 공연을 보는 당일만 오사카에 있었고 여행은 거의 교토에서 이루어졌었다. 오..
어제 로댕전을 관람하고 왔다. 문득 내 안에 아픔 비슷한 것이 있는 것을 느꼈다. 외롭고 치열하게 예술을 하다간 정직한 작가를 대면하고 나니, 내 안에 재능을 올바르게 계발하지 못한 게으름에 대한 양심의 괴로움인 것 같았다. 또 예술을 위해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한 친구를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나는 얼마나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세상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은 나를 위해서인것 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창조주를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어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신의 손 위에는 남녀가 있었는데, 악마의 손 위에는 한 명만 올려져 있던 것이다. 그걸 보면서 로댕은 필시 외로운 사람임에 틀림없다, 라는 확신이 왔다. 연인의 키스 조각상이 눈물나게 감명깊었던..
그리운 암스테르담 Noord, 뒤편에 보이는 긴 건물이 바로 Amsterdam Centraal Station이다. 긴 건물 좌측에 보이는 돔 모형을 한 지붕의 건물은 St. NikolaasKerk이다. 나는 센트럴 스테이션 뒤에 있는 페리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이리로 건너왔다. 보스턴 야구캡을 쓰고 헤드폰과 아이팟, 그리고 아버지가 쓰시던 바람막이 조끼를 입고서. 당시 같은 학교 학생인 미선이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Noord의 캠핑장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암스테르담 시내의 구석구석 마지막으로 돌면서 아쉬운 작별의 시간을 가졌었다. 시간은 9시가 다 되어가고 우리는 주머니에 있는 2유로 동전 하나를 들고 베이스 앞 더비로 가 자전거를 세우고 Patat (더치식 후렌치 후라이) 하나를 사먹고 앉아서 '마지막..
Mari Vitikka 키예프 UofN에서 만난 Finish DTS 팀이었다. 매리앤이 나와 아샤에게 100유로를 플로잉해준 덕에 핀란드 팀과 친해져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었는데, 핀란드 사람들은 관계에 있어서 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며 보통 유럽 사람들과 그런 점에서 좀 다르고 이상하다는 표현을 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친해지고 나면 수더분해지지 않더냐고, 맞다고 마리는 말했다. 하지만 마리는 그 팀 중에서 가장 활달한 아이였고 프랜들리한 따뜻해보이는 친구였다. 한국에 와서도 먼저 연락한 것은 마리였다. 정말 핀란드 사람이라 그런지 피부는 얼음처럼 하얫고 머리칼은 북반구 태양처럼 눈에 잡히지 않는 눈부신 컬러를 하고 있었다. 그 성격도 그녀의 색감 만큼이나 밝았다. 장난기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