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성령 (11)
저녁의 꼴라쥬
몰트만은 이 책, 을 통해 균형잡힌 종말론적 신앙을 제시한다. 특히 잘못된 종말론으로 인해 발생한 수없이 많은 이단과 사이비 단체가 있으며, 비단 이단이 아니더라도 한국교회 안에서 종말론에 대해서 목회자가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선포하게 될 때, 그것이 얼마나 개개인의 현실을 도피하게 하고 병들게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한 달 안에 읽는 것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 기회이자 도전이었다. 몰트만의 책은 그리 읽기 쉬운 책은 아니며 분량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몰트만의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그의 책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참신한 신학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굉장히 균형잡힌 신학자라는 생각이 들게 되기 때문이고 동시에 상당히 넓은 신학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
나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대립각이 전부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대립각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사람의 이것은 저사람에게는 타협의 여지없는 치명적인 이론이다. 저사람의 저것은 이사람에게는 너무나 꽉 막힌 갑갑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전부 경험해보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를 소용돌이치며 나선형으로 오가면서, 나는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은 심정이다.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나 위험은 너를 잃어버리는 파멸로 이끈다. 안정을 추구하라, 그러나 안정은 너를 질식시키고 타자를 배제한다. 위험을 감수하다 나는 어느새, 안정으로 빗장을 걸고 지켜야 할 때를 알게 된다. 안정을 추구하다 나는 어느새, 빗장을 풀고 회오리처럼 풀려 나가야 할 때를 알게 된다. 나는 울고 싶다. ..
"성령을 따라 행한다"라는 것이 단순하게 그때그때 즉흥적인 흐름에 맡긴다는 뜻이 된다면 이 또한 반쪽짜리 진리가 된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부인하면서 그 다음 스텝을 어느 방향으로 내딛어야 하는지에 대해 주도면밀해야 함을, 오히려 그 근신과 절제에 대해서 민감한 계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살기 원한다면 나의 정욕과 탐심은 십자가에 이미 죽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 안에서 우리는 교모하게 획책을 꾀하는데, 이것은 무의식의 선상에서 이루어지며,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수로 시작하였다가 자꾸만 스스로의 의로 변질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가, 자꾸만 못을 빼고 내려오는 것은 이러한 ..
바르트의 말대로, "사도직", "사자"는 우리의 정체성의 지평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정체성이 부딪혀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먼저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에는, 다시 죄에 대한 방탕으로 빠질 수 있는 도랑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에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푯대가 필요한데, 이 푯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통해 우리가 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도의 푯대는, 율법과 같이 고정된 일차원적인 한 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타고 함..
때로는 비둘기와 같은 순결함이 타자에게 폭력과 배제가 된다. 때로는 뱀과 같은 지혜가 스스로를 기만하고 타자도 기만하는 파멸이 된다. 때로는 그 둘을 잘 배합하고 변증적으로 잘 순환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 굳게 "순수하게" 믿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그러진 길로 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다윗 왕에게는 나단과 갓, 사울에게는 사무엘이 있어서 그가 어그러질 때 그를 견책해주었다. 스스로가 한계가 있는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모를 때, 인간은 초극을 향해 달리기만 한다. 그리고 어느덧 자신이 제일 무지하고 어리석음의 도랑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차라투스트라가 빠진 오류라고 나는 생각한다.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라.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성령이 다른..
그러므로 두가지 자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말 모든 것에 대한 자유, 성령은 이 억압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역사한다. 이 자유에 놓여질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질문한다: 무엇이 나에게 방향성을 제공하는가? 나는 이 자율성을 가지고 어떤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자의성이라기 보다는 의문이다. 그는 말씀 안에서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그를 자유케 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의지도 없다. 여기에서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접점을 오직 성령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대답은..
성령에 매인 사람이 오히려 가장 자유롭다. 그리고 그는 자의적으로 어떤 것을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그대로 행한다. 성령에 매여 광야로 간 예수는 자신의 필요를 보지 않았다. 떡도, 권세도, 안전도. 예수는 오직 성령에 매여 순종했고, 자신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행했다. 가라 할 때 가고 멈추라 할 때 멈추었다. 바울도 그러했다. 계속되는 고난에 모든 이들은 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도 갔다. 성령에 매인 사람은 바람과 같다. 자신의 뜻대로 머물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충성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
자유와 원칙의 변증법은 계속해서 순환할 것이다. 지구 저편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의 소리가 외쳐질 것이고, 해방에 대한 기쁨으로, 참된 (나는 이것은 예술가적인 자유라고 말하는 것 이외의 가장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자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전히 그 자유로 생겨난 부스럼들과 허물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해서는 원칙이 따라가야 한다. 방향타가 없는 자유는 없다. 올바른 방향타가 있는 자유는 놀랍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참되고 완벽한, 창조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누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성령을 통해 열매맺고 있음을 확신하자. 억누르..
그러니까 성화는 결국 성도를 자유 가운데로 이끈다. 이 성화의 여정 중에 혹시 자기 성화나 자기 경건에서 오는 긴장의식을 느끼고 있다면 오히려 내려놓는 것이 좋다. 긴장하고 있다면 그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 성령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상이나 벌 때문에 성화"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중 은혜의 하나로써 한없는 사랑 가운데서 견인되어지고 성화"되어지는" 것이다. 내가 피동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구원이나 거룩에 대해 전적으로 무력한 출발선상에 있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접붙여져야 시작할 수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창조되어진 순간부터 피동적이며, 구원에 있어서도 그러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잠잠히 서 있어야 한다. 그러..
"내니 두려워 말아라"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낯설었다. 그는 더 순결해지고, 더 빛으로 가득했다. 제자들은 그를 영체로 보았을 수도 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위치에 있었고, 죽음을 이긴 예수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삼일만에 만난 예수는 삼천년이 지난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된 예수같았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는 너무도 낯선 승귀된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니 두려워 말아라, 안심해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는 분명 새로워졌다. 그에게는 어떠한 일련의 극복의 과정이 분명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낯설음"으로 느껴졌고, 낯설기에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는 그들과 지평을 함께 하기를 자처한다. 예수의 사랑은 신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