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학술회 발표 결론에 다다르면서 장 뤽 교수가 번역한 최근의 리쾨르 책을 펼쳐보았다. 책에 밑줄 그어진 펜의 흔적을 보면서 문득 파리의 카페에서 느긋하게 이 책을 읽던 6월이 떠올랐다. 한창 사역을 하다가 잠시 궤도를 벗어나 학술회 참여 겸 프랑스와 독일에 다녀왔다. 오랜만에 반가운 교수님들을 만나고, 오래된 파리 개신교 학부 강의실에서 부채질을 하며 수업을 듣다가, 더위 때문에 발표 내용과 상관없이 시원한 강당의 세션을 선택했던 기억이 난다. 매미가 신나게 울고 있었고, 매일 아침 5구의 거리에는 포르 루아얄 의과대학의 수업과 진료를 위해 학생들이 분주하고 오가고 있었다. 수업이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건물 1층의 트라토리아에 가서 피자와 콜라를 시켜 먹었다. 이 건물에 대만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스페셜티 ..
새로운 시간이 일어났다. 주말 새벽기도 시간에 식은 땀이 흐르고 어지럼증에 모든 스케쥴을 취소하고 집에 기거하기로 했다. 고통이 주일까지 이루어졌고 오후에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고 돌아왔다. 새로운 시간은 탈주의 리듬과 함께 시작된다. 삶은 애초의 한 개의 선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최소 두 개의 선로가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현실의 선로이며 다른 하나는 환상의 선로이다. 그런데 가끔 비현실의 선로가 현실의 선로를 일깨워낼 때가 있다. 이날이 그런 날이었다. 48시간 누워있던 나는 기적처럼 일어나 당일에 비행기 표를 끊고 공항으로 향했다. 내가 탄 기차가 막차였다. 도시의 표피와 근접하여 달리기도 하고, 도심 중앙을 관통하며 건물들 사이를 횡단하기도 했다. 수백의 맨션 불빛들이 밤 한 가운데에서 새..
2024년 나의 일본 열도 반주 여행은 달리는 것 자체에 기쁨이 있었다.2025년의 홋카이도 여행 또한 정주하는 동시에 달리는 여행이었다. 히라가나로 쓰여진 노보리베츠登別역에 내려보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고자 우리는 낡은 유황온천탕을 가진 오래된 료칸에 묵었다. 밤에는 나방과 싸웠고, 아침에는 산과 싸웠다. 내 여행은 휴가보다는 산행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전차와 택시와 기차를 번갈아 타며 질주하기도 했지만 아침에는 삿포로 ABC 마트에서 산 러닝화를 신고 달리고 저녁에는 시내를 걷고 또 걸으며 만화책을 사고 라멘을 먹었다.북오프에 가서 이노우에의 바가본드를 한권에 120엔을 주고 열권 정도 담아왔다. 괴수8호는 편의점에서 새 책으로 샀다. 매번 캐리어를 꽉 채우는 만화책들을 보며 아내를 한숨을 질..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불러들이는 작업이다. 그 순간의 감각, 말, 공기, 불빛들이 되살아난다. 그리움은 기억의 세포를 농후하게 한다. 독일 학교 도서관에는 카페테리아가 외부와 연결되는 회전문이 있었다. 학생들이 샐러드 볼을 들고 잡담을 하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노트북을 키고, 와하핫, 웃는 소리가 정원에 가득하다. 독일 커피는 고유의 색과 농도가 있다. 식사를 하러 철학부 학생식당으로 가는 언덕 길 나무에서 체리를 따먹었다. 풀밭에 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커피는 거른 적이 없다.쾰른을 지나 네덜란드 국경으로 들어서면 푸른 띠를 두른 노란 기차가 나온다. 암스테르담 셀트랄에서 터져나오는 소란함, 수없이 탔던 트람, 수없이 걸었던 운하, 수없이 먹었던 감자 튀김의 냄새를 나는 재현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
나의 유학의 마지막은 기차여행이었다. 베를린을 거쳐 함부르크에 도착한 나는 코펜하겐으로 가는 열차에 올랐다. 기차는 북독일에서 기술상 문제로 정차했다가 접경지역을 지나 활처럼 생긴 덴마크 반도를 가로질렀다. 내 기차는 29유로짜리였고 숙소는 40유로짜리였다. 가진 것이 없어도 떠나고자 하는 열망만으로 시작되는 여행이 있다. 뉴욕에서 1불짜리 핫도그를 파는 스트리트를 찾아 헤맬 때와 자전거로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네덜란드 도시에서 60센트 짜리 빵을 사먹던 때가 있다. 고생은 다 이야기거리가 된다.결핍에서 생겨나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독일 골목 허름한 빵집의 빵냄새, 등이 굽은 안토니오 씨가 화덕에서 마르게리따 피자를 꺼내어 아무렇게나 6등분하여 내놓고 에스프레소를 낡은 머신에서 뽑아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