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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꼴라쥬
오늘은 출근길에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그래서 오늘은 자전거를 집에 매어두고 왔다. 비오는 날 진돌이를 집에 매어두고 나갔다 오면, 누런 털 냄새가 그렇게 진동하곤 했다. (냄새가 진동한다는 표현은 참 문학적이다. 냄새는 특유의 파장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허리가 아팠다. 누워서 책을 읽곤 하는 나쁜 습관 때문인 것 같다. 어제는 누워서 오르한 파묵의 과 새물결플러스에서 나온의 홈스 롤스턴3세의 '비움과 자연' 부분을 읽었다. 앉아서는 키에르케고르와 레비나스, 성경을 읽었고, 를 마침내 다 읽었다. 키에르케고르는 무구함이 불안을 만나게 되면서 자유를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고, 에서의 홈스 롤스턴은 '자발성'이라는 것, '자유'라는 것이 도덕과 연계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덕을 가..
오늘부터 출근하는 길에 지하철 역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보았다. 역까지는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님에도 자전거를 매어두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다리에 무거움이 느껴진다. 그동안은 쉬는 날이나 저녁 시간에 짬짬이 자전거를 타왔는데, 쉬는 날이 없어지게 되면서 나의 자전거는 게으른 주인이 산책을 포기한 개처럼 현관 앞에 한동안 매여 있었다. 가을도 눈깜짝하면 지나가고, 은행잎과 플라타너스잎이 거리에 모자이크처럼 빼곡이 쌓일텐데, 그전에 부지런히 타두지 않으면 이 개는 하염없이 주인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예전에 진돌이(키우던 진돗개의 이름이다)를 오랫만에 산책시킬 때마다 녀석의 목줄에 거무튀튀하게 먼지가 끼여 있는 것을 보고 미안해 했었는데, 이 자전거의 하얀 프레임에도 눅눅한 먼지가 끼어 있는 것이었다. 미남 진..
나희덕 시인께서 드디어 신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의를 해주셨다.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질문들이 화산의 라바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차마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에 하지 못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 집에 가셔야 하는 교수님과 시인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해버렸다.사실은 시에 대한 컴플렉스 내지는 억압기제가 있었나 보다.그 기원은 나의 지인들에게서, 그리고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동시에 그 세밀한 조탁 능력 때문에 다소 주관이 뚜렷한 작가인 친구에게서 발원하는데, 나의 내면에는 이미 타자의 시선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기 검열작업이 나의 시에 끊임없이 칼질을 해댔던 것이다. 미용실에서 정형화된 팜플렛 속의 헤어 스타일에 국한되어 선택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나는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던 시의 미친 달리기를 버리고 '..
두려움이 먼저 사라져야 한다. 이 두려움은 율법에서 온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를 질식시키고 모든 아름다운 가능성도 함께 박탈시킨다.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피해 숨으려 한다. 그러나 의지만으로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으며 오히려 로마서 7장의 말씀처럼 죄 아래 팔리는 것을 본다.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면 더더욱 그 죄를 피하면서도 그 죄 아래 팔리게 되는 모순의 존재가 인간이다. 로마서 8장의 대전환처럼 우리에게는 힘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항복하는 것이 생명을 향한 열쇠가 되어준다. 항복은 7장까지의 흐름처럼 내가 '어느 정도' 죄인이 아니라 '뼛 속까지 더러운' 죄인이며 그 모든 실행되지 않은 죄가 이미 가능태로서 내 안에 죄다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미 살인이 내 안에..
나는 너무도 혼란스럽다. 내 안에는 두 개의 대립각이 전부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대립각이란 것이 존재한다. 이 사람의 이것은 저사람에게는 타협의 여지없는 치명적인 이론이다. 저사람의 저것은 이사람에게는 너무나 꽉 막힌 갑갑한 이론이다. 그러나 이 둘을 전부 경험해보면서, 위험과 안정 사이를 소용돌이치며 나선형으로 오가면서, 나는 너무나 괴로워 울고 싶은 심정이다.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나 위험은 너를 잃어버리는 파멸로 이끈다. 안정을 추구하라, 그러나 안정은 너를 질식시키고 타자를 배제한다. 위험을 감수하다 나는 어느새, 안정으로 빗장을 걸고 지켜야 할 때를 알게 된다. 안정을 추구하다 나는 어느새, 빗장을 풀고 회오리처럼 풀려 나가야 할 때를 알게 된다. 나는 울고 싶다. ..
바르트의 말대로, "사도직", "사자"는 우리의 정체성의 지평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정체성이 부딪혀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먼저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에는, 다시 죄에 대한 방탕으로 빠질 수 있는 도랑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에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푯대가 필요한데, 이 푯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통해 우리가 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도의 푯대는, 율법과 같이 고정된 일차원적인 한 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타고 함..
그러므로 두가지 자유가 존재한다. 하나는 정말 모든 것에 대한 자유, 성령은 이 억압에 대한 해방에서부터 역사한다. 이 자유에 놓여질때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있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질문한다: 무엇이 나에게 방향성을 제공하는가? 나는 이 자율성을 가지고 어떤 선한 방향을 가져야 하는가? 그의 질문은 자의성이라기 보다는 의문이다. 그는 말씀 안에서만 그 대답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성령이 그를 자유케 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후에,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를 데리고 가신다는 사실을 그는 알게 된다. 여기서 그는 다시 질문한다: 아아, 그러나 나는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다. 의지도 없다. 여기에서 그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접점을 오직 성령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말씀 안에서 대답은..
성령에 매인 사람이 오히려 가장 자유롭다. 그리고 그는 자의적으로 어떤 것을 행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와의 교제 속에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뜻을 분별하여 그대로 행한다. 성령에 매여 광야로 간 예수는 자신의 필요를 보지 않았다. 떡도, 권세도, 안전도. 예수는 오직 성령에 매여 순종했고, 자신의 유익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오직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행했다. 가라 할 때 가고 멈추라 할 때 멈추었다. 바울도 그러했다. 계속되는 고난에 모든 이들은 그를 만류하였으나 그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갔다. 고난이 있을 것을 알고도 갔다. 성령에 매인 사람은 바람과 같다. 자신의 뜻대로 머물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충성된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나 성령의 사..
자유와 원칙의 변증법은 계속해서 순환할 것이다. 지구 저편에서는 계속해서 자유의 소리가 외쳐질 것이고, 해방에 대한 기쁨으로, 참된 (나는 이것은 예술가적인 자유라고 말하는 것 이외의 가장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자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여전히 그 자유로 생겨난 부스럼들과 허물들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자유에 대해서는 원칙이 따라가야 한다. 방향타가 없는 자유는 없다. 올바른 방향타가 있는 자유는 놀랍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참되고 완벽한, 창조적인 자유이다.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되,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누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마음을 성령을 통해 열매맺고 있음을 확신하자. 억누르..
"내니 두려워 말아라"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낯설었다. 그는 더 순결해지고, 더 빛으로 가득했다. 제자들은 그를 영체로 보았을 수도 있다.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위치에 있었고, 죽음을 이긴 예수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다. 삼일만에 만난 예수는 삼천년이 지난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된 예수같았다. 제자들에게 있어 예수는 너무도 낯선 승귀된 모습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니 두려워 말아라, 안심해라"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예수는 분명 새로워졌다. 그에게는 어떠한 일련의 극복의 과정이 분명 있었고, 제자들에게는 이것이 "낯설음"으로 느껴졌고, 낯설기에 두려움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는 그들과 지평을 함께 하기를 자처한다. 예수의 사랑은 신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