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99권을 그린 작가와 1권을 그린 독자층의 이야기 본문

콜랴 크라소트킨

99권을 그린 작가와 1권을 그린 독자층의 이야기

jo_nghyuk 2010. 7. 29. 19:50
그는 만화가였다. 야구를 그리는 만화가. 그가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비록 매니아적인 독자들 뿐이긴 했으나) 승부의 결과를 독자들이 예상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것이, 이십년간 연재한 만화가, 아직도 그의 팀이 결승에 올라가보질 못했던 것이다. 그의 팀은 매우 조용하고 끈기있게 성적을 냈다. 성적은 상향곡선을 그리지는 않았지만, 아래로 곤두박질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이십년간 만화를 연재한 것이다. 그의 단행본도 이제는 70권을 넘어섰다. 사람들은 그가 평생 하나의 만화만 그리고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이 사십이 되어서야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G펜과 같은 능숙한 힘조절을 요하는 펜을 쓸 수 없어, 초보자용 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어시스턴트 두 명을 두어, 자신이 그동안 회사원으로서 번 돈으로 스튜디오를 꾸려나갔다. 스튜디오라고는 하지만, 무경험인지라, 오피스텔에 방 두개와 거실 그리고 화장실이 딸려있는 자그마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잘해나갔다. 갑자기 만화가가 되려고 생각한 것치고는 매우 잘했다. 회사원으로 사십세까지 보낸 시간은 마치 자금을 모으기 위한 시간이라 생각될 정도로.
그림을 잘 그린다기 보다는 자신의 그림체가 뚜렷했고, 대학시절때 교양과목(이라 하기엔 전공과목에 가까웠다)으로 타과의 드로잉테크닉 1,2 와 데셍연습 1,2,3을 들어둔 경험이 고목의 줄기처럼 그의 손감각을 탄탄히 백업해주고 있었다.
그의 취미는 주말마다 근처의 야구장에 가는 것이었다. 스프라이트 캔과 캐슈너트 봉지를 들고서, 사람이 별로 없는 섹션을 찾아 앉아 아이팟으로 케니 도햄이나 케니 드류등의 재즈를 실컷 들으면서 시합을 관람하곤 했다. 그의 목적은 응원도 아니었고, 그저 그 시간을 게임으로서 즐기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기쁜 것이지만, 그는 한 팀을 자신의 축으로 삼아 그 축이 패배할 때마다 패인이나 아쉬움들울 노트에 적어내려가는 것을 더 즐겼다. 조용한 재즈를 여전히 들으면서. 그리하여 훗날 그 수첩이 스토리화되었고, 독자들은 그들의 팀이 승리하든 지든 그것이 지닌 묘한 리듬으로 인해 그의 만화를 즐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가 인생이 끝나려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그의 수명이 다함과 더불어 이 만화의 결말이 궁금해졌다. 이 팀은 이기게 될 것인가? 아니면 같은 성적을 여전히 내며 여전한 궤적을 그리고 그 궤도가 둥글게 이어져 영원성을 띄게 될 것인가?
점차 사람들은 승리나, 패배가 일시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만화를 진정 즐기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감동적인 한요소를 요구했으나 Quiet Kenny처럼 점잖은 그의 애독자들은 그저 스프라이트와 캐슈너트, 그리고 조용한 재즈의 선율과 함께 이 만화의 리듬만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것이었다.
작가 자신도 별 고민없이 그림을 그리며 사는 듯 했다. 이십여년 동안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선수였던 이가 이제는 감독과 코치로서 그 팀을 이끌고 있었고, 선수의 아들들이 홈베이스를 밟고 있다.
사람들은 만화의 리듬이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만화에는 시점은 있어도 주인공은 없었다. 시점 역시 삼인칭이나 이인칭에 가까웠다. 그러나 점차 시점이 일인칭 비슷하게 바뀌는 것과, 주인공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주인공의 팀의 승률은 기복이 심해지고, 짜릿한 우승을 하는 일도 더러 생기게 되었다. 자연히 독자들의 반응도 변화가 일어났다. 단행본을 75권 산 한 애독자는 더이상 단행본을 사지 않게 되었다. 어떤 독자는 76권부터 단행본을 사게 되었다고 말했다. "글쎄요. 전에는 좀 지루했달까요. 만화 잡지를 사면 거의 안읽다가 정말 심심할 때 5주치 쌓인 읽지않은 만화들을 읽으며 시간을 때울때나 보게 되는 만화였는데 말이죠. 근데 이제 뭔가 좀 다르네요" "이건 쓰레기에요. 마치 드래곤볼이 프리더가 죽을 때 끝내지 않고 손오반이 주인공이 되어서 스토리가 변질되어버린 것과 똑같아요" 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점차적으로 팬들은 75권까지의 '올드보이' 팬과 76권부터의 '2기'를 주장하는 신 추종세력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점점 루머가 돌기 시작했다. 만화가가 죽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했으며, 그의 어시스턴트가 바톤을 이어서 스토리가 변질되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되었다. 그의 매니아층은 만화의 주인공 팀이 우승을 하는 시점부터 와해되기 시작했고, 만화에서 캐슈너트와 스프라이트, 케니 드류와 콰이엇 케니의 향과 리듬이 사라진 것을 알고 떠나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움직임도 있었다. 일부 매니아들이 동인지를 만들어 스스로가 마지막 76권을 만들어 그 리듬에 매듭을 짓고 영원한 리듬을 그들끼리 소유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실력 좋은 사람들이 모여 스토리를 짜고, 그의 그림체를 추종하는 이들이 마지막 콘티를 짜 '제 76권'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미 그 만화는 다른 트랙을 향하고 있었고, 점점 원형이었던 궤도는 긴 선처럼 풀어져 어디로 갈지 기약없이 뻗어져나가고 있었다. 어떤 정신나간 이는 그 작가를 납치하려고도 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 미친 궤적을 끊고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하지만 여전히 작가는 보이지 않았다.
몇년이 지난 후, 여전히 새로운 팬과 떨어져나간 옛애인들을 거느린 이 만화의 작가의 작고 소식이 들려왔다. 독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만화는 마무리되지지 않았고 어딘가 어중간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살이 아니었다. 자연사였다. 99권째의 단행본이 나오기 직전이었다. 출판사는 유작인 99권을 내놓았고, 이번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독자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다시 새로운 동인을 결성했는데, 물론 76권부터의 내용을 지지하는 팬들이었다. 그들은 100권째의 내용을 그동안의 스토리 구성에 맞추어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76권부터의 내용의 줄기를 가지고 있었다. 100권이 나오고 사람들의 반응은 매우 좋았다. 여전히 자신들의 76권으로 스토리를 마무리 지은 동인들은 등을 돌렸으나, 매우 많은 사람들이 100권째 단행본을 샀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더욱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1권부터 100권까지를 구입하는 새로운 독자층이었다. 이들은 76권부터의 내용을 읽고 나서, 1권부터 75권까지 단행본을 사는 경향을 보였는데, 물론 뒷이야기를 더 사랑하고 중시하눈 사람들이었지만 앞의 안정감있는 리듬 역시 관심을 보이고 사랑한다는 덤에서 매우 새로운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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