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교토 2 본문

지금의 조리개 값

교토 2

jo_nghyuk 2012. 8. 20. 13:23

사실 숙소의 도미토리의 문을 열기 전만 해도, 이번 여행이 고독과 살결을 맞대고 하는 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서른 살이 되도록 지금까지 나는 얼마나 고독을 대면할 줄 알았는가 생각해본다. 방학이 나에게 혼자가 되는 시간을 줄 때마다 나는 그 고독의 생경함에 어쩔 줄 몰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친구에게 급히 연락을 해서 혼자가 되는 길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었다. 나는 특히 한국 사람이, 혼자가 되는 시간을 마주하게 될 때, 어떻게든 모임을 만들든지 그 안에 편입되든지 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외국에서 들은 일이 있었다. 자유의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선용하지 못하고 바로 공동체가 주는 안정감과 그것을 교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주일 사역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 허탈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이 기분은 사람들과의 시간을 매우 즐겁게 보내고 난 뒤일 수록 더 했다. 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겁기 위해서 더더욱 즐거운 에너지를 썼다. 특별히 광대놀음을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상승적인 에너지가 참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상승이라는 것이, 자칫하면 가벼워지는 방향으로 이르기 쉬워서 우리는 무게감이라는 것을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고독은 어쩌면 학습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로우의 글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고독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무게중심을 고독의 세계에 두며 그 중심원으로부터 관계를 가져 나가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일종의 견고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무게중심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가. 

고든 맥도날드는 고독의 시간을 우리가 반드시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시간은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시간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듣는’ 시간이고, 일기를 쓰는 시간이라고 했다. 

교토에 도착하자 마자 내가 느낀 진한 감성은 바로 이 고독과 외로움이었다. 선교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개개인이 외로움의 슬픔을 진하게 느끼고 있는 도시였다. 그런데 그건 암스테르담도 마찬가지였다. 뉴저지도 마찬가지였고 뉴욕에서도 동일했다. 현대인들은 모두 외로움을 앓고 있다. 그러나 고독을 학습하지는 않는다. 교토의 사람들은 그런데 고독이 아니라 외로움을 학습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지나친 생각이었을까?


도미토리 방문을 열자 일본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노트북 옆에 누워 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얼굴 옆에는 길다란 캔 맥주. 빡빡머리에 검은 뿔테 안경. 분명히 일본인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는 인상이다. 나를 보더니 일어나서 자기 노트북을 만진다. 게스트하우스 스탭인 것 같다. 나에게 묻는다. ‘니혼진데스까’ 

나는 일어로 한국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게 스탭이냐고 물는다.

‘아, 한국 사람이셨구나’

별안간 한국말이 그의 입에서 나온다. 나는 이제 그가 한국 사람임을 알았다. 

‘스탭이신가요?’

그는 스탭이 아니라 일본에서 두 달째 자전거 일주 중인 여행자였다. 배를 타고 간사이에 도착해서 후쿠오카를 돌고 다시 간사이에 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홋카이도로 올라가서 일주를 하려고 했는데 비자가 얼마 남지 않아서 다시 후쿠오카로 가기로 했다고.

그에게서는 참으로 긴 외로움의 냄새가 묻어나왔다. 이 두 달동안 그는 외로움과 고독 중 어떤 것을 학습했을까. 고속도로 옆을 달리며 얼마나 긴 외로움과 씨름했을까. 외로움과 싸운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과 살결을 맞대고 하는 씨름과도 같다. 사람은 스스로를 안을수록 더 고달프게 슬퍼진다. 나는 가모가와에 앉아서 물냄새를 맡던 정지용을 떠올렸다. 


도미토리 방에는 총 6인이 머물 수 있는 이층 침대가 있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나. 둘 뿐이다. 처음 친구와 교토에 갔을 때에는 전세계의 여행자들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아삽, 영국의 초등학교 교사 할머니, 이탈리아의 커플, 동경에서 온 카나코, 오키나와에서 온 산부인과 의사까지. 아직도 그 밤의 즐거운 공기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그러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점점 나의 그런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아시겠지만 어제까지가 기온 마츠리였어요. 외국인들이 어제까지 여기 가득 찼었는데 어제 마츠리 끝나고 썰물처럼 다 빠져나갔죠’

사실 나는 기온 마츠리를 피해 항공 스케쥴을 이틀 미뤘었다. 한적함을 찾아서 교토에 다시 왔는데 이 무더운 여름에 사람들에게 치이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온 마츠리가 끝나고 여행자들도 대부분 교토를 빠져나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도미토리 방에 있는 한국인에게 인사를 하고 나왔다. 밖에는 교토에서 유학을 하는 수연 누나와 나와 일본 여행 일정이 겹치는 명혜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누나가 수학하는 도시샤 대학으로 갔다. 몇 년만에 보는 대학 교정은 빽빽하게 세워진 자전거와 교정 정중앙에 솟은 커다란 나무를 제워하고는 다소 생소했다. 나는 학생증을 빌려서 도서관에 들어가보았다. 방학 중, 늦은 밤인데도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알고 보았더니 아직 시험기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적어도 나에게는 자극이 되었다. 세계적인 신학교의 모습은 도서관에 들어가보아야 알 수 있다. 교정이라든가, 도서관의 모습은 우리 학교에 비해 부러운 점이 참 많았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누나에게 이런저런 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던 것 같다. 내가 일본 신학 수업을 들었던 낙운해 교수님 이야기에서부터 세이가쿠인 대학과 도시샤 대학까지. 그리고 석사를 하지 않고 바로 도시샤 대학 유학으로 과감하게 도전을 했던 이야기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누나는 유학생으로서 참으로 치열하게 도전하고 씨름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미래의 비전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도 참으로 구체적이었고 성실했다. 


아, 나는 무얼 하고 있느냐. 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도미토리 방에 돌아와서도 한국인 여행자와의 대화를 통해 이 사람이 하는 여행 하나 하나도 치열한 계획과 도전, 그리고 씨름 가운데 하루 하루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은 참으로 무게감이 대단한 여행이었다. 만난 사람은 적지만 만난 이 한 명 한 명이 무거웠다. 그리고 그들은 많이 고독했다. 방에 있던 여행자가 마트의 마지막 타임 할인 음식을 사러 나갔을 때 나는 심하게 무거워졌고 외로워졌다. 아내가 그리웠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있는가. 


다시 한국인 여행자가 돌아오고 우리는 많은 대화를 했다. 그는 말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내가 여기서 대체 뭘하는 거지? 우울감에 빠질 때도 있지요. 그럼 그때는 돌아가야 되는 때에요. 거기가 끝인 거죠. 그러나 그 순간 무엇이라도 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무언가 되더라구요. 그럼 그때는 계속 앞으로 나가는 거죠. 저는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 두 달 째 여행을 하고 있어요’

그는 한국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나의 질문에 다음번엔 유라시아 횡단이라고 대답했다. 순례적인 어떤 것이 그의 말에서 느껴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8년 전에 너는 록 밴드를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지금 너는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냐?

단순히 쉬기 위해, 옛 추억에 3일 동안 젖어 있기 위해서

낭만주의 시인처럼 현실을 잊고 과거로 도피하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냐?


만약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나는, 이곳에서 8년 전에 사랑하던 것을 하나도 사랑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과거의 나를 찾으려 할 때 나는 미아가 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곳에 정주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에 있었다. 다시 교토, 는 나에게 환승 지점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자기 전에 지도를 펴고, 전에 가지 못했던 교토의 서쪽 끝, 아라시야마를 찾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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