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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길

jo_nghyuk 2012. 9. 17. 22:18

나는 대학이란 숲을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따금씩 책을 한권 들고 나무의 겨드랑이로 숨어들 때가 있다. 벤치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나의 학교 뒷편에는 사색하며 배회할 만한 산책로가 있다.
강의실에 앉아 수업을 듣다가 문득 창 너머로 이 산책로를 바라보는 때가 많다. 그때마다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을 품고 있었던 산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철학의 길"은 교토와 하이델베르크 두 군데에 있다. 교토의 철학의 길은 평지인 반면에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은 거의 능선에 가깝다.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까지의 언덕길이 원래의 철학의 길이고, 일본의 것은 나중에 독일의 것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 한다.

나는 하이델베르크의 철학의 길을 등산하듯 올랐던 기억이 있다. 돌아와서 그 길이 어땠냐고 물으시는 목사님께 "목사님, 철학의 길은 등산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목사님은 어쩌면 그 길이야말로 철학의 길이고 신학의 길이지 않겠느냐고 나에게 반문하셨다. 

어쩌면 평지의 길은 철학의 길은 될 수 있어도 신학의 길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 언덕길을 그저 꼭대기에 올라 시내 전경을 보기 위함으로 아무 생각없이 힘겹게 오르기만 한다면 그것은 개론서 한권을 읽은 것만 못한 것과 같을 것이다. 

나는 두 철학의 길을 모두 가보았다. 두 길 다 이제는 철학하는 이 보다는 구경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일본의 철학의 길은 수평적이고 독일의 그것은 수직적이다. 일본에 간 이들은 처음부터 아름다운 길의 조망권을 얻는다. 길 옆에는 수로가 있고 벚꽃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독일에 간 이들이 철학의 길에서 만나는 것이란 양 옆이 막힌 좁은 돌담길 뿐이다. 그 길에서 너는 아무 조망권을 얻지 못하고, 다만 막힌 돌벽과 언덕을 접할 뿐이다. 한 시간 여를 힘겹게 올라서야 아름다운 붉은 지붕들이 얼기설기 모인 하이델베르크의 시내 풍경을 얻을 수 있다. 
 
칸트는 매일 같은 시간 이 길을 산책로로 삼아 사색을 했다 한다. 그러나 정작 그대가 그 언덕 길을 걸을때는 정말이지 칸트의 사색은 커녕 아픈 다리로 얼굴이 사색이 될지도 모른다. 

너는 회색 돌벽 사이의 좁은 길을 오를 뿐이다. 너무나 자주 그저 오르고 오르는, 고된 행위 자체에만 정신이 쓰인다. 무한한 반복에 가까운 페달링. 어느 순간 정상에 대한 생각보다는 걷는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다행히 2/3정도를 오르면 어느 정도의 조망권을 얻을 수 있는 지점이 있다. 많은 사람은 이곳의 벤치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먼 산책로를 오르게 된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길에서 사색이 된 얼굴로 고통 그 자체에만, 양 옆이 막힌 담 사이에서 페달링 자체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힘든 것이다. 이 길은 미래적인 기대감과 현재적인 고통이 씨름을 하는 곳이다. 지적 희열과 신앙적 회개가 몸을 섞고 몸부림을 치는 곳이다. 그 리듬이 익숙해지며 점점 생의 춤을 배워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 앞에 서서 한시간 이상 그 그림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지만 그 감정은 유약할 따름이다. 나는 눈물을 오랫동안 흘려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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