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시를 쓴다는 것은 여린 생선살을 단단하게 뭉친 밥알들 위에 올려 놓는 것 본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를 쓴다는 것은 여린 생선살을 단단하게 뭉친 밥알들 위에 올려 놓는 것

jo_nghyuk 2012. 11. 3. 15:23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 장인이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 하나 대강 하는 것이 없이, 적절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향한 배열이 소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돌멩이 하나의 위치도 정성스레, 바위가 땅에 박혀 있는 깊이의 정도에 대해서도 치밀하게 고민해보고, 다시 위치를 바꾸어보기도 합니다. 물줄기는 어디에 있어야 가장 쾌적한지, 어느 종류의 나무를 심을지, 그늘과 햇빛은 어느 정도의 비율을 이루어야 할지를 조정moderate해간다는 점에서 정원을 만드는 일에 비유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만의 날 것의 언어를 상대방이 먹음직한 크기로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보암직도 하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의 영양적이고 미감을 자극한다는 측면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스시를 만드는 장인의 자세와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저는 전에 시를 쓰는 것이나, 소설을 쓰는 것에 대해서, 피아니스트가 백건과 흑간을 조합하는 것에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작가는 결국 ㅁㄴㅇㄹㅎ 와 ㅗㅓㅏㅣ의 흩어져 있는 모음 자음들의 팔레트를 가져다가 조합하고 구별하는 화가이며, 피아니스트입니다. 이 세 명의 공통된 점은, 그들은 자신의 내부에 그림의 씨앗을 가지고 외부로 발아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점에서 자신의 씨앗이 무엇이든 자음의 화살을 모음의 활로 계속해서 쏘아대고 있다는 점을 바르게 인식해서, 말을 신중하게 조합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 조합에 따라, 그 쏘는 것이 독화살이 될 수도 있고, 치유의 광선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칼을 들고 있는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그를 행복하게 하는 한 점의 영양이 가득한 스시가 되기도 합니다. 정성이 없다면, 사랑을 담지 않는다면 칼을 들지 않는 편이 좋으며, 활을 내려놓는 것이 좋으며, 키보드를 옆으로 밀어두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들을 발화함으로써 진정 세계에 대해 민감해지고, 진지해집니다. 말을 할 때에 내면은 외연을 향해 발아되고, 구체화되고, 가지치기와 배열을 통해 세련화되어집니다. 나는 외부에 더욱 민감한 사람이 되어서, 떨리는 햇빛이라든지, 여리게 움직이는 나뭇잎들과, 그 색조들의 선율을,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새들의 그림자들을, 실타래 같은 바람의 근원을 추적해볼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더욱 우리의 내부로부터 외연으로 확장되어질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글을 쓸 수 있도록,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도록 사랑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화자가 되고 싶습니다. 밀폐된 청자를 다시 화자에 대한 대화의 상대요, 상호적인 화자를 만드는, 그런 글을 쓰고 싶고, 그런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를 쓴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인내를 요구로 합니다. 나에 대해서, 너에 대해서, 내가 발화한 섣부른 말들이나, 내가 휘갈긴 서투른 글들에 대해 우리는 용서받아야 하는 존재들이며, 그것을 수정해나가고 교정받아야 하는 겸비함을 우리는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제 친구는, 릴케를 인용하며, "진짜 시는 만년에 쓸 수 있는 한 줄의 문장"이라고 표현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스시 한 점을 위해, 정갈한 정원을 위해, 시 한 줄을 위해 나는 극도로 여리고 민감한 순을 오늘도 나의 외부로 밀어냅니다. 나의 외부는 낯설음 투성이이며, 비실재적인 통각으로 가득합니다. 들끓는 여름의 맨하탄에 갔을 때 그러했고, 무심한 가을의 암스테르담에 갔을 때가 그러했듯, 나는 여전히 외부로부터 움츠러드는 달팽이의 여림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 여림을 가지고, 단단한 외부를 향해 밀고 나가는 것이, 시의 힘이요, 신중한 말의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외부를 향해 갈 때 이 신중함을 지니고 가야 합니다. 설령 그 틀이 깨지고 부스러지고, 전복되고 재형성되어져야 한다고 해도, 우리는 이 여림과 신중함을 가지고 외부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중함과 여림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무목적의 방황wandering과 표류drift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너무도 여리고 민감하며 두렵고 신중하며 소심하다면, 조금 더 용기를 내십시오. 그러나 그 사소한trivial 것을 버리면서까지 외연화할 정도로 무리하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당신의 여린 그 떨림은, 여전히 빛에 의해 포옹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할 수 있는 자유의 토대가 되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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