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저녁의 꼴라쥬 본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저녁의 꼴라쥬

jo_nghyuk 2012. 12. 19. 19:13

백금같이 명징하던 해가
호박죽처럼 초라해지는 시간
왕자가 거지가 되고
늑대가 개가 되며
나약해지고, 깨지고, 부들거리며, 우울하고, 어둡고, 괴로워지며, 쥐어짜는 시간

사랑에 빠진 이들의 심장처럼 곤죽이 되고,
과부하가 걸린 노트북처럼 버벅이고, 방금 꺼진 형광등처럼 놀란 맥박들이 어리둥절하고,
조용한 확신으로 기쁨의 칸타타를 흘려보내던 정원이, 시끄럽도록 슬픈 혼혈아들의 뉴올리안즈 재즈 놀이터로 변한다

윤곽이 흐릿함에도 질료는 그대로 있고
각자가 차지한 공간도 침노당하지 않았으나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 세계는 비로소 벌거벗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어둠 속으로 당신의 조각들을 넘겨주기 전에, 아직 점멸하는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처럼 의식과 기회가 남아 있을 때에. 윤곽선과 흐릿함이 동시에 살아 있는 이 짧은 날짜변경선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힘을 주어야 할 것이다 조금 더 힘을 내고. 조금 더 상대를 받아들이고 조금 더 나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 시한부같은 저녁의 시간대에서 우리는 조금 더 짠한 영화와 같이 진솔하고 정직하게 될 필요가 있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는데 눈알부터 뽑히며 개로 자라는 이들도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