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그림자, 빛, 동행자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그림자, 빛, 동행자

jo_nghyuk 2013. 1. 2. 13:06
바르트의 말대로, "사도직", "사자"는 우리의 정체성의 지평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정체성으로서 우리에게 부여된다. 
우리의 내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가 있다. 이 두가지 전혀 다른 정체성이 부딪혀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먼저 우리가 자유함을 입었다고 선포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죄책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러나 해방에는, 다시 죄에 대한 방탕으로 빠질 수 있는 도랑의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해방 직후에 우리는 인도함을 받을 푯대가 필요한데, 이 푯대는 고정적이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미 율법이 우리를 온전케 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통해 우리가 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인도의 푯대는, 율법과 같이 고정된 일차원적인 한 점으로서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타고 함께 움직이는 유동적인 무엇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 성령이 이제 우리에게 유동적인 인도자로서의 "자유의 율법"이 된다. 그리고 단순한 문자로서가 아니라, 성령은 선생이며 동시에 동행자가 된다. 그리고, "위로자"가 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우리를 인도하는 율법은 우리가 그것에 부합할 때는 우리를 살리나, 부합하지 못할 때는 우리는 죽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정성이라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고정된 것은 상황과 맥락에 대한 폐쇄성이 되어 살아있는 것을 질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동성이 필요한데, 이 유동성은 결코 "자의적"이어서는 안된다. 왜냐면, "해방을 위한 해방"은 결코 자유의 순수에 머물지 않고, 그 순진무구한 얼굴로 죄를 가리는 도랑에 스스로 치닫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한, 우리를 인도하는 이 유동성은 "하나님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성령자신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너희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두 위험 사이에 놓인 비참한 중간자이다. 율법으로부터 질식당할 것인지, 욕심대로 사는 죄인이 될 것인지 이 두 가지의 결정밖에는 없는 (사실은 자유가 전혀 없는!) 어처구니 없는 실존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오실 때에 비로소 이 율법과 욕심이 아닌 사잇길로 활로가 열림을 우리는 보게 된다. "단순히 순종으로" 우리는 율법이 우리를 통해 성령에 의해서 성취됨을 보게 되고, "주어진 자유로" 우리는 육체를 향한 죄성의 억압으로부터 스스로가 해방되어짐을 보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순종은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골을 염두에 두고 슛을 하는 선수는 없다. 그런 선수가 있다면, 그는 경기자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군사로서의 사명이라면, 그 무게는 더할 것이다. 어쩌면 성도는 경직이 아니라, 긴장으로서 스스로에게 부여되는 이 "새로운 정체성"을 향한 무게감을 감당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엄 앞에 서는 두려움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돌보신다. 우리가 인지해야 하는 것은, 내가 나의 실패와 실수를 돌보는 순간, 인본주의와 자의적 불순종의 도랑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군사는 스스로를 돌보거나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돌보는 관계의 장 안에서 그는 능력을 맛본다. 내가 나를 돌보는 유혹을 예수님은 승리하시고 통과하셨다. 예수는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 그는 순종만을 염두에 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돌보셨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심을 신뢰하며 순종했다. 이것은 자신을 방치하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구별되어져야 하는 래디컬한 순종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를 하나님은 긍정하신다. 자기를 긍정하는 자를 하나님은 부정하신다. 
갈라디아서는 자유를 말하며 동시에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는 자유"를 말한다. 그렇다면 성령의 인도는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몰트만이 말했듯,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는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 자유는 사랑을 목적으로 하여 주어지는 과정으로서의 자유이다. 
성령은 오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그 즉시 우리를 인도해가신다. 동행자로서의 성령이 이때 함께 하신다. 놀라운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큰 자유가, 자율성이 이때 있다는 것이다. 인격으로서의 율법인 성령은 우리의 모든 상황과 맥락을 이해한다. (그러므로 성령을 속이는 일까지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이제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진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처음 실존으로서의 우리 또한 두 가지 선택에 놓여져 있었음을 주목하자. 율법에 질식당하느냐, 욕심의 죄인이 되느냐의 부자유한 선택에 우리는 놓여 있었다. 
그러나 중생, 곧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입은 두번째 실존으로서의 우리 또한 두 가지 선택에 놓여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유한 선택이다. 우리의 영은 새로워졌고, 영은 살리는 것이고, 자유해지는 것에 의해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육체 가운데 거함으로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처음 접했던 동일한 두가지 선택의 질문에 놓여진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유가 있다. 놀랍도록 충격적인 것은 두 가지의 대답 모두 진정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끔찍할 정도의 자유라고 표현한다. 진정 모든 것을 향할 자유이며, 죽음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자유이다) 
이 질문은 이제 이것이다. 
1. 나를 숨통이 트게 하는 자유의 율법에 순종할 것인가
2. 이 자유로 죄를 가리면서 살 것인가

나는 이 지점에서 다시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몸을 뻗는다면,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초극을 원하는 괴물이 되려 하는 것이다. 이 진리 앞에 선다면, 차라리 무한한 자유 앞에, 자비 앞에 눈물을 흘리며 벌벌 떠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반응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가 말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돌보아서는 안된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의 이야기다) 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한에서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순종을 위해서 달려야 한다. 넘어지는 우리를 돌보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우리가 달리는 것 또한 능력으로 붙드는 것도 성령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넘어진 후를 제외하고는" 넘어짐을 염두에 두고 달려서는 안된다. 
그러나 동시에 넘어지지 않을 것을 자신만만해서도 안되며 다만 서 있을 때에 넘어질까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자신만만한 자는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신중하고 조심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를 지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은 육체 가운데 사는 새로워진 영의 레슬링과 같다. 그리고 이 레슬링이 치열한 전쟁의 양상이기도 하며, 어느 때는 육신을 돌보는 춤과 같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를 누가 분별할 것인가? 누가 그 때를 자의적으로 담대하게 정할 것인가?
누가 "모든 것에 대한 자유"를 아무 거리낌 없이 다 소진하고 사용할 것인가? 모퉁이에 두고 온 "덕"은 언제 사용할 것인가?

이제 마지막 결론을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이 결론 또한 미완으로서 기다림을 요한다. 

1. 문자의 율법은 고정된 한 점이다
1.1 그 고정된 한 점은 유동하는 육체를 가둔다
1.2 육체는 율법 안에 질식할 것인지, 율법 밖에서 타락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1.3 그러므로 율법 아래 모든 육체는 판결 받는다. 그리고 율법 밖에서도 그는 판결받는다
1.4 종으로서의 우리의 실존

2. 성령은 유동하는 인격으로서의 율법이 되신다
2.1. 성령은 인간에 대하여 선생, 동행자, 위로자가 된다
2.1.1 선생은 앞서서 나를 인도하는 권위자이다
2.1.2 동행자는 옆에서 나를 붙드는 능력이다
2.1.3 위로자는 뒤에서 나의 넘어짐을 안아주는 포용이다
2.1.4 이 셋은 우리의 응답의 리듬과 함께 춤춘다
2.2 자유자로서의 우리의 실존

3. 하나님은 먼저는 우리를 해방하신다
3.1 해방한 이는 사랑의 응답을 기다린다
3.2 해방된 이는 자유로 응답을 선택한다
3.2.1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바를 자유롭게 살게 된다
3.2.2 그리고 하나님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물으신다
3.2.3 우리는 스스로가 그와 (율법과) 동행하였는지에 대해 대답해야 할 것이다
3.3 동행자로서의 우리의 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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