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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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오늘은 어제의 죽음이다

jo_nghyuk 2013. 1. 11. 11:40
새 사람은 오늘의 사람이다. 그는 어제와의 단절을 느끼는 사람으로서 오늘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자아의 경향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물가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도 그 말씀으로 인해 새로운 경향으로의 촉발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날마다 새롭다. 그는 오늘 전혀 다른 새로움 가운데 살아있게 된다. 옛 사람은 어제의 사람이며 과거형의 사람이다. 자아의 경향으로서 그 사람은 아래로, 자아 중심적으로 수렴되어지는 사람이다. 생명의 영과 사망의 육을 말할 때, 단순히 우리는 육체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한계성과 하늘의 무한성을 고려하여 유비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느끼는 모든 상황과 긍정하는 사고체계와 긴장관계에 놓여있는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고체계에도 그가 "자신을 부정함"로서 비로소 "새로움을 긍정"하며 스스로를 열어젖힐 수 있는 전환에 대한 유연성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니다, 이것을 유연성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깨어짐이며 연약함을 향한 부서짐이라고 말하는 것이 낫겠다. 애초부터 그의 안에는 그 큰 간극을 수용할 만한 용량이 이미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새 사람을 날마다 입는다, 는 것은 옛사람이 충격을 받으며 위기에 빠진다 는 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날마다 그는 옛 자아의 위기로서의 도랑과 새 자아를 향해 뛰어넘어야 하는 도전으로서의 간격에 대해 그가 신실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랑을 건너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령의 운행하심이며, 기도를 통해 사로잡히게 되는 하나님의 주권하심인 것이다. 
옛 자아는 발버둥치고, 몸부림친다. 거부하고, 울부짖고, 현상유지에 대한 고집을 피운다. 실로 옛 자아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상실이다. 

그러므로 순종이란 유연성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직성의 파산 상태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꽃과 같은 것이다. 유연성은 그에게 속하여 있지 않다. 그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은 자아의 죽음이며 파산이다. 그는 이러한 모든 전환점마다 몸을 돌리기 위해 자아의 (여기서 자아란 옛 사고체계와 상황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파산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애초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인가, 애초부터 내가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 무엇인가, 모태에서 가지고 나온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가지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부단히 붙들어야 하는 것은 순종이며, 순종으로 말미암은 참된 동행의 방향성 뿐일 것이다. 

옛 사람을 벗어버린 이는 이제 새로운 운동성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며 그것은 곧 성령의 바람의 정형화될 수 없는 리듬 속으로 들어서게 됨을 의미한다. 바람이 어디서부터 부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에 순종하는 사람, 새 자아는 오늘의 불명확성 가운데 놓여져 있다. 무엇을 상실하게 될지, 무엇을 얻게 될지의 염려 또한 상실되게 되고, "바람 가운데" 있을 때에 비로소 그의 안에 평화가 가득차게 된다. 이 바람은 평안의 바람이다. 이 바람은 변화의 장소로 이끄는 동시에 가장 안정적인 장소가 되어주는 역설을 품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은 방향성이며 방향성은 이 바람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방향에 순종하는 이야말로 능력장 가운데에서 참된 능력과 생명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깨닫게 된다. 옛 자아야말로 울부짖으며 모든 것을 잃는 "정지상태"의 스올로 자신을 나선형으로 밀어넣고 있다는 것을. 
또 새 자아야말로 참된 기쁨과 안정, 변화를 통해 운동이면서도 정지인 상태를 통해 자신을 확장시키고, 모든 것을 누리게 하고, 참으로 자유케 하며, 참으로 이전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참된 의미로서 더 친밀해지게 한다는 것을.

참된 지혜는 누추한 현상유지를 벗어던지는 정직된 응답의 길에서만 발견되어진다는 것을. 
지혜는 정직한 길로만 다닌다. 이 지혜의 근원 또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속성은 정직이기 때문이리라. 


2013,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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