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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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있는 임재의 무거움

jo_nghyuk 2013. 2. 7. 13:11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류장이 보이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시켰다. 
비둘기는 가만 보면 참 예쁘다. 목덜미에는 반짝이는 청록빛과 자주빛이 어우러지는 네클레스를 걸고 있는 것 같고 잿빛 프록코트를 입은 신사처럼 뒷짐을 지고 도로변을 산보한다. 
자동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아이를 꾸짖는 엄마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어온다. 나는 커피를 마시다 말고 버스가 오는 것을 보고 급하게 점원의 인사를 등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포천 갑니까?'
'이 버스는 안 갑니다. 다음 버스 기다리세요'
나는 다시 커피숍에 들어와 1분 전에 앉았던 자리에 와 앉았다.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멋적은 기분이 든다. 손에 든 커피가 입장권이라고 되는 양 테이블 위에 눈에 띄게 놓아둔다. 
마침내 버스가 오고 철원으로 가는 군인 몇과 함께 차에 오른다. 자리에 앉으니 기사가 오늘 신문을 나누어준다. 커피를 앞에 꽂아두고 보사노바 풍의 음악을 들었다. 왠지 비행기를 타는, 아니 최소한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차창 밖에는 눈이 쌓여 어깨가 무거운 소나무들이 가지를 내리고 있는 게 보인다. 전구를 가득 두른 트리처럼 나무는 무겁고 기쁘다. 
눈이 오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누구의 선택도 아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머리에, 건물들은 옥상에, 차량들은 지붕에 눈을 얹고살고 있다. 간판의 글자마다 자음 모음 할 것 없이 그냥 눈을 얹고 살고 있다. 나는 세상이 별 수 없이 눈을 얹고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는 것이 왠지 기쁘고 우습다. 
달리는 버스는 어느덧 산을 끼고 덜컹거리며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오른다. 눈 덮인 나무들의 산을 본다. 얼룩말의 등처럼 포근하고 슬프다. 눈은 겨울의 위로다. 모든 없음과 결핍에 대한 위로이다. 눈은 빈 곳을 채운다. 그리고 조용히 스러진다. 
문득 여름에 눈이 내리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눈은 겨울에 필요한 위로이고, 비는 여름에 필요한 축하이다. 만물은 비로 격려를 받아 풍성해진다. 그러나 눈은 위로이다. 나무도, 동물들도, 사람들의 집도 겨울이 되면 주체할 수 없는 결핍을 경험한다. 만물은 춤과 같다. 춤은 몸도 아니고, 공간에 머물러 있는 질료도 아니다. 춤은 시간의 트랙을 타고 방문하는 선물이다. 그리고 춤은 우리의 뒤로 지나간다. 춤을 추던 것들은 정적을 경험하게 된다. 슬퍼할 필요는 없다, 라는 말은 초연해 보이기는 하나 날개를 단 인간처럼 비정하다. 그래서 생각해본다. 슬퍼한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이고, 우리가 춤과 같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그 안에 존재의 어쩔 수 없는 허공을 품고 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 머리에 쌓인 눈이 나는 기쁘고 즐겁다. 눈은 마른 가지에 쌓이는 위로이다. 텅 빈 곳을 채우는 평등한 균형이다. 그러나 눈은 스러져간다. 위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물은 노아의 홍수와 마찬가지로, 그 위로에 압도되고, 함몰될 것이다. 위로는 단지 충분하게 머문다. 적당하게 온도가 올라가고, 우리가 볕을 필요로 할 때, 눈은 스러져간다. 
나무는 겨울이 되어서야 자아를 마주하게 된다. 스스로가 광활한 하늘을 찌르는 한 줄기 가시일 뿐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나무는 고난 중에 부들거리는 것 뿐만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방식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눈이 가볍게, 다가온다. 우리의 실존만큼이나 가벼운 무게로 다가와 우리가 감당할 만큼의 무게로 가지에 쌓이며 무거워져간다. 임재는 가볍게 다가와 무겁게 머무른다. 현존의 춤은 시간의 트랙을 타고 가볍게 다가오지만 춤 자체는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다. 시간에 나누어 담지 않으면 몸은 춤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릴 것이다. 때로 우리는 모든 것을 일순간에 담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점차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폭포는 물방울로부터 시작되고 나이아가라 폭포에 네 눈물 방울이었던 것이 담겨져 쏟아지는 중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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