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낯익은 동행인 본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낯익은 동행인

jo_nghyuk 2013. 3. 18. 13:31
우리는 언제나 개방성에 대한 요청과 도전을 받는다. 단지 외부와 내부의 이분법적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육체성이라는 것을 이야기할때도 이제는 단순히 육체를 논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라는 말은 순진한 이분법이다. 영혼 또한 악할 수 있다. 마음의 육체성이라는 표현을 기억해볼 때, 우리는 육체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낡아져가는 어떤 것, 유한한 피조물성, 자기반복을 추구하는 내적 폐쇄성이 육체성이라고 정의내려보자. (이것도 불충분하겠지만)
오히려 육체성과 반대되는 것이 육체의 내부에서 생겨난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위로부터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이면서도 내부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육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어떤 활력을 '창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새 사람이라고도 부른다. 새 사람은 매일 새롭게 창조되어진다. 옛 사람이 매일 파괴되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새 사람은 좀 더 개방을 향하며, 유연하고, 순결하며, 이끄심에 대해 순종적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기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은 새로움 그 자체이다. 매순간 폭발하는 새로움이다. 매순간 아름다운 생명이 그에게서 폭발하고 있다. 그는 이 계속되는 새로움으로 세계를 창조하셨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과 활력이 이 세계 가운데 지금도 유지되고, 갱신되어지고 있다. 이것이 생명의 영이 하시는 사역이다. 
옛 사람에 대해 조금 얘기해보자면 그것은 가시와도 같다. 새 사람이 길을 가는데에 있어 발목을 구차하게 잡고 늘어지는 동행인 아닌 동행인이다. 우리는 그럼에도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동행인 아닌 동행인과 씨름하며 살 수 밖에 없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간질일 것이요, 예술가에게는 광기일 것이요, 어떤 이들에게는 신경증일 것이다. 또는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는 삶의 제약이기도 하다. 
이 육체성은 죄성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고, 모호한 영역의 연약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그가 달려가는 데에 있어서 '그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 발목이 붙잡히는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해결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그것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갈 것이요, 때로는 그것을 십자가로 지고 갈 것이요, 때로는 그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멈출 것이다. 
모든 이에게는 가시가 있고, 가시는 죄일 때도 있고, 연약일 때도 있으며, 모호한 병리학적 증상일 때도 있다. 제약적인 상황일 때도 있다. 그러나 역시 한가지 결론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가시의 순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달려나가는 말의 힘이 아니다. 군사의 수가 아니다(시 33). 오히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는 겸손과 하나님을 더 바라보는 사랑이다. 가시에 대한 구원의 능력이 나에게 있지 않으며, 가시를 또한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에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가시는 '통제할 수 없는 숙명적인 동행인'이다. 그것은 내 안에 심기워져서 계속해서 나를 치며 약하게 한다. 그러나 그 순간마다 오히려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을 할 것이다. 바울이 모욕 중에, 고난 중에, 박해 중에, 어려움 중에 그 약함을 기뻐하는 것은 오히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폭발적이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말의 힘이, 군사의 수가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는 약한 이 안에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힘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모든 '육체성', 내 안의 가시와 씨름하고, 피 흘리고, 아파하는 모든 이를 향한 하나님의 든든한 선언이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