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진격의 개인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진격의 개인

jo_nghyuk 2013. 5. 24. 08:47
대학 시절, 락밴드 콘서트장에 간 일이 있다. 좀 느긋하게 가서 긴 줄의 뒤쪽에 서야 했다. 몇 시간 기다린 후 콘서트장에 입장하면서 드디어 넓은 콘서트홀이 나오자, 일순간 입장하던 긴 줄의 직선이 일그러지고 마침내 무너지면서 백미터 경주처럼 스탠딩 앞자리를 향해 모두들 진격했던 일이 있다.  

이번 경복궁 야간개장은 그 콘서트장을 떠오르게 했다. 왕이 다니는 가운데 길을 줄로 해서 길고 넓은 줄이 근정전으로 가는 입구에서 바깥 입구까지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줄을 서지 않고 곧장 앞으로 가는 사람들이 줄은 선 사람 수만큼이나 많았다. 재밌는(?) 것은 줄을 서지 않은 사람들은 다소 수월하게 입장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큰 줄에 서 있었는데 한시간 여를 기다린 후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사실 예매권을 가진 사람들은 순서에 상관없이 모두 바로 입장이 가능한 사람들이다. 모두에게 바로 입장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절반은 줄을 서고, 절반은 줄을 서지 않는다. 그리고 줄을 서지 않는 이들이 더 수월하게 입장한다. 스태프는 통제기능을 상실했다. 입장권 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줄을 서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인가? 철저히 개인주의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러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여전히 받지 않아도 될 피해를 받는 이들이 있다. 정직해서 더 속수무책이 되어가는 상황이었다. 
줄을 선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시간과 공간을 배려한다는 것이다. 이 규칙이 무너질 때, 혼돈 속에서 조금 더 먼저 들어가는 이와 한참 늦게 들어가는 이가 무작위적으로 배정된다. 조금 더 먼저 들어가려는 사람이 많아질 수록, 이 혼돈치가 가중되고 모든 사람은 여유라는 것을 잃는다. 나에게 시간과 공간에 대한 확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나는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나가야 하고, 결과적으로 내가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면서 다른 사람이 들어갈 확률에 대해 혼돈치가 조금씩 늘어간다. 철저히 승패가 갈리는 게임과 같다. 

내가 경복궁에서 보았던 것이 우리나라의 자화상이 아닐까. 이미 줄은 무너졌다. 멀뚱히 서있는 사람은 가장 뒤에 남게 될 것이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공간도 그러하다. 예매를 하고도 시간이 지나면 입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두는 뛰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승자와 패자가 생기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입시경쟁과, 취업문제와 너무 비슷한 양태를 보인다. 

구조적인 문제가 사실 먼저 보였다. 4만 명을 3-4시간 이내에 작은 궁의 입구로 (특히 경회루로 가는 입구는 낙타 바늘귀 문과 같다) 들여보내고 내보내려면 철저히 인원에 대한 통제가 있어야 한다. 인력도 그만큼 더 투입되어야 한다. 앞에서 얌체처럼 끼어들지 못하게 막아주는 가이드 라인을 세워주어야 한다. 조금 늦게 들어가는 것은 상관없다.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할수도 있다는 불안과 조급증에 빠진다. 아름다움을 감상하러 가는 길도 메트로폴리탄에서는 벌통의 벌떼와 같은 번잡함을 감수해야 한다. (차라리 벌떼가 낫다) 

그리고 나는 짠한 마음을 느낀다. (사실 어제 현장에서의 마음은 짜증에 가까웠지만) 이것이 우리의 의식의 수준인 것이다. 전체에 대한 의식, 타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결여, 철저한 개인주의 (공지영 씨가 무지함은 죄가 아니지만 몰상식은 죄라고 하던데 나는 무지함을 가장한 몰상식을 느꼈다. 사람들은 순진한 표정을 하고는 줄이 없다는 듯 앞으로 가서는 입구에서 끼어들기를 한다.)가 사실은 "우리"라는 전체의 여유를 박탈해버렸다. 개인주의적인 개개인은 전체 질서의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소로서 작용한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이 반이나 된다는 것이 실로 유감이고 이 사회의 혼란과 불안, 조급증의 자화상을 본 것 같아 착잡했다. 

개개인에게 자유가 많이 보장된 시대이다. 앞으로는 더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긍정적인, 매우 인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자유만큼 책임의식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타자에 대한 배려와 타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없다면, 진격하는 거인들과 성벽이 무너지는 착잡한 소인들의 이 사회의 지옥도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약자에 대해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선과 악의 편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의도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이" 타자의 시간과 공간의 성벽을 부수는 거인적인 자아를 개인주의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자유가 있는 개개인은 타자에게 진격의 거인이 될 수도 있고, 공동체를 이루고 타자를 지켜주는 성벽이 되어줄 수도 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