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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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해방적 미친 달리기로서의 시 쓰기

jo_nghyuk 2013. 11. 14. 23:44

나희덕 시인께서 드디어 신학교에 오셔서 문학 강의를 해주셨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질문들이 화산의 라바처럼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서 차마 공개적인 질의응답 시간에 하지 못하고 강의가 끝난 뒤에 집에 가셔야 하는 교수님과 시인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공세를 해버렸다.

사실은 시에 대한 컴플렉스 내지는 억압기제가 있었나 보다.

그 기원은 나의 지인들에게서, 그리고 뛰어난 역량을 가진, 동시에 그 세밀한 조탁 능력 때문에 다소 주관이 뚜렷한 작가인 친구에게서 발원하는데, 나의 내면에는 이미 타자의 시선이 내장되어 있어서 자기 검열작업이 나의 시에 끊임없이 칼질을 해댔던 것이다. 

미용실에서 정형화된 팜플렛 속의 헤어 스타일에 국한되어 선택하는 사람의 심정처럼, 나는 자가예프스키가 말했던 시의 미친 달리기를 버리고 '달리지 않는 시민'의 무리 속으로 숨어 들어간 소라게는 아니었을까.

오래전 지인에게서 나의 영감의 미친 달리기가 소통을 놓치고 코너를 돌아버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로, 친구들에게서 당최 당신의 시는 뜻을 알아먹을 수가 없겠노라는 이야기를 미완료형으로 지금까지 들어오고 있는 나로서는, 미용실에서 상반신이 가운에 덮힌 손님처럼 스스로의 시를 손질할 수 없는 슬픈 가위손의 정원사와 같은 상태가 되어있는 것이고, 수첩에는 여전히 미친 말들이 뛰어놀고 있으면서도 나의 삶에서는 춤이 없는 억압된 알프레드 프루프록 신사의 페르소나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신학생으로서 또 전도사로서 나의 시에 있어서 나는 도약적 시도를 몇 번이나 했던가 

어쨋던 시인에게 나의 고민, 저의 영감의 속도가 글을 앞지르는, 아니 내 글의 영감이 독자를 앞지르는 고민에 대해 토로하자 시인은 '그 생각에서 해방되라'는 해방신학적인 자유를 나에게 알려주는 것이었다. '꼭 독자와 소통하려 하는 의식에서 자유해야 한다. 요즘 김경주 시인이나 황병승 시인을 비롯한 현대 시인들, 젊은 시인들의 시는 독자와 소통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자신을 발산하는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시인에게 다시 질문했다. '저는 그렇다면 지금까지 탈고에 있어서 잘못된 방식, 예전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탈고를 시도했던 것이군요. 현대의 해방적인 글쓰기, 발산적 산문적 글쓰기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층위의 탈고가 이루어지겠군요'라는 말에 시인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 생각은 나에게 치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나는 어쩌면 전보다 더 자유롭게 춤을 추고, 노래를 하고, 시를 쓸지 모른다. 나는 산문성의 강박에서 해방되고, 운문성의 강박에서, 경계인의 모호성의 강박에서, 완전해지려는 강박에서, 타자의 시선에 대한 강박, 판단에 대한, 소외에 대한 강박에서, 해방되어 글을 쓸 것 같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미친 달리기로 시를 쓸 것이다.

프란츠 리스트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의 미친 달리기로서의 악보와 연주에 대해 공허함을 지적하는 사람이 많지만, 어쩌면 그는 그러한 광기의 언덕을 달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저 서정성의 노을이 일렁이는 지평선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스트의 컨솔레이션은 그의 랩소디의 질곡의 고난과 화려함과 천의무봉의 기교의 허무함의 태산을 넘어서지 않으면 얻어지지 않을 평정심일 것이다. 보들레르에게 있어서 시의 달리기란 그런 것이었고, 바이런에게도 그러했을 것이다. 지용이 이상에게 '이놈! 네 글 아느냐!'라는 혹독한 책망을 퍼부었을때 이상이 쪼그라들었다면 그는 산문도 운문도 쓸 수 없었을 것이며 무한한 탈고로 인해 그의 정수와 비본질들이 탈골되어 허무한 울림만이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상한 혼합체, 본질과 비본질의 혼합, 비가시적 교회와 가시적 교회만큼이나 거룩성과 죄의 공존, 혼합이 아닌 공존? 인간은 사실 모호성 가운데 있다. 그의 안에 성령으로서의 신성은 거룩성이나 그의 인성, 인간됨은 상당히 모호한 공존의, 아니 나아가 혼합적인 어떤 필연성과 숙명성의 슬픔 안에 사람이 실존적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오랫만에 블로그에 쓰지만,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의 제한된 글쓰기로서는 나는 내 언어를 마음껏 풀어놓을 수가 없다. 이곳은 어쩌면 사람들에게서 멀어진 행성과 같을 것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이곳으로 오는 궤적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개인의 내밀성이 사라진 공동체 안에서의 늑대는 점차 자신도 모르게 개의 형상으로 탈모되어간다. 변모가 아니라 나는 탈모라 생각하는데, 저녁이 다가옴에 따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것, 모발의 있음과 없음의 공존으로 인해 없음, 저 무로 향한 이행이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어둠은 스위치를 끄듯이 오지 않고, 빛과 어둠이 혼재하면서 그 콘트라스트의 농도를 더욱 밀도있게 해나가며 빛을 밀어낸다. 빛이 후퇴하는 것이지 어둠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어둠이 오는 것은 혼재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이 혼재성을 인식하지 않고서 이 저녁과 같은 시대에 빛과 같은 글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의 모호성과 연약성, 미친 달리기를 할 수 밖에 없으며 트럼펫처럼 소리지르고 싶은 실존성을 인식하지 않고서 나는 어떤 시도 쓰지 못할 것이며 저 서정적인 선율을 만나지도 못할 것이다. 라디오헤드의 톰요크는 just와 같은 미친 기타리프의 통쾌함 후에야 nice dream과 같은 영롱한 아르페지오의 평정심을 소유할 수 있었다. 태풍과 같은 광기의 달리기가 모든 먼지를 걷어내지 않는다면, 결코 청아한 하늘은 오지 않는다. 아무 변화가 없는 글쓰기, 아무 변화가 없는 기후는 쌓인 먼지와 같다. 초기-바르트는 놀이터에 폭탄을 터뜨림으로 비로소 후기-바르트와 같은 통전적이며 여유있는 에큐메니칼 신학자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너무도 빠르게 어른이 되려고 한다. 어린아이들의 미친 달리기의 시간을 우리는 무정차하며 지나치고 싶어한다. 이유는?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이며, 억압 때문이며, 효율성에 미친 이 피로사회의 요구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요구를 채워주고 싶어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기능성 인간 컴플렉스이며 증후군에 걸려 있다. 이 사회는 낙인을 찍는 사회이다. 그런데 사실, 그 낙인은 허상일지도 모르고, 우리 내면에서 그 두려움의 크기를 디스토션을 걸어 소리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여정을 떠나지도 못하는 자가당착적 자기반복에 빠져있다. 바다에는 세이렌들이 노래하고 있으며, 두려워하는 이들은 육지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파선할 것을 두려워한 배는 이제 해변의 건축물이 되어버렸다. 떠 있으나 나아가지 못하는 배, 양서류이나 육지를 떠나지 못하는 생물처럼 신학자이든 시인이든 평범한 소시민이든 우리는 그렇게 소박하게 살고 있다. 소박함은 죄가 아니다. 소박함은 슬픔이며 외로움이며 그저 그런대로 안주하게 하는 인간 존엄성의 상실이며 욕동의 억압이며 망각이다. 소박한 사람들은 죄인들이 아니라, 거세된 어른아이들일 뿐이다. 

참된 소박성은 미친 달리기 후에 통전성을 깨달은 사람의 평정심일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 나는 소박한 이들을 비난하고 싶지도, 멸시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내 안에 걸린 드라이브에 대해, 나는 디스토션을 걸고 이제는 발산적인 글쓰기를 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인 교회에서 그들이 소리지르며 하는 기도가 참되며, 한국 교회의 한의 맥락에서 통성으로 기도하는 교인들의 기도가 참되었던 것처럼 (참되었었던 것처럼) 어쪄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글쓰기는 소리지르는 글쓰기여야 한다.

Just because you feel it

doesn't mean it's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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