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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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적 지평 확장에 대한 두려움

jo_nghyuk 2014. 1. 20. 19:06
나는 항상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해왔다. 현상학적 발생에 대한 두려움이랄까. 그러한 감각들이 현시되면 마치, 뭐랄까 죄를 지은 것처럼, 선악과를 먹은 후의 눈이 밝아짐의 느낌이랄까, 존재의 장이 개방되어지면서 일단의 두려운 감각이 먼저 발생하였던 것이다. 파도치는 불안하고 거친, 바다의 날씨가 그 장에 음습한다. 금방이라도 삼켜질듯한 그곳에 내가 정초할 수 있는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곳에 가본 적 없느냐고? 글쎄, 여러번 나가보았고 수차례 파도와, 암초와, 나쁜 기후와 싸워보았고 실존적인 가치로 빛나는 여러 파편들, (파편들, 파편들) 을 얻어내기에 이르렀지. 그런데 문제는 바다에 나아가고 나면 방향타를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류라고도, 항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알수없는 행위를 나는 내 외부의 현상학적 바다 한가운데에서 수행할 뿐이었다. 물론 돌아오면, 여러가지 전리품들을 허리에 차고 오긴 했지만, 이런 질문이 따라오는 것이다: 이것이 전부인가? 이것이 네가 너의 장을 떠난 이유의 전부인가? 너는 무엇을 얻기 위해서 나갔는가 아니면 네 감각의 현시에 대해 충실하게 생을 살아내고 너를 전개하고, 생의 감각들을 깨워내고 확장해내기 위해 방사해나갔는가?

자유의 일면일지도 모른다, 네게 현시된 감각에 대해, 외부에서 열려진 가능성에 대해 너 자신을 개방시키는 모험과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성취되어지는 경험들 또한 자유의 일면이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바다 위를 hovering할 뿐, 정초되어지지 않을 것이다. 자유는 단지 떠나는 행위이며, 전개의 과정일 따름인 것인가? 그렇다면, 자유는 피로한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는 고뇌이며, 자유는 쇼펜하우어적 고통일 따름이다. 너는 왜 원하지 않는 고통의 자유 밖에 원할 따름인 것인가?

이로 볼때, 자유는 정초에 대한 떠남이며, 머무르기 위한 떠남인데, 그 정초는 무덤이 아니며, 훗날 깊은 바다 속에 가라앉을 난파선이 아닐 것이다. 너는 죽기 위해 산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영원성 가운데 정초할 수는 없는가? 살아있으면서, 너를 전개해가면서, 너의 외부의 열려짐의 현시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내뻗으면서도 안전할수는 없는 것인가? 이성을 무력하게 만들고, 감정을 미치지 않게 하면서 참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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