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단순한 삶의 기쁨 - 22.02.201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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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삶의 기쁨 - 22.02.2017

jo_nghyuk 2018. 4. 17. 02:43


예나에 온지도 열흘이 넘어간다.

나는 Kunitz라고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이 집에는 Schöppe 부부가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부른다. 가끔씩 할머니께서 내려오셔서 Alles gut? (다 잘 돌아가고 있니?)라고 물으시고, 세탁기 사용법이나 침대 커버를 가는 법, 쓰레기를 분류하는 법등을 알려주시는데, 할아버지도 함께 내려오셔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영어로 동시통역(이라고 하기에는 약간의 두통과 시간차를 지녔다)을 해주신다. 처음 이곳에 온 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배추와 (날아다니는 베트남의) 쌀, 그리고 피망을 냉장고에 귀엽게 넣어두시고, 버스 정류장에서부터 걸어서 25분 정도 거리의 기차역까지 함께 동행해주셨다. 처음 온 주의 주일에는 우리를 Orgel Konzert에도 초대해주셨는데 그게 우리 부부에게는 참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이 마을은 마치 동화 속의 마을과도 같이, 강을 건너고 언덕을 오르면 예쁜 독일식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산 아래의 마을이다. 강을 건너면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양들이 있는 초장이다. 건초를 먹으며 울고 있는 양들을 지나 교회가 보이는 언덕으로 오르면 우리가 거하는 집의 동네가 나온다. 어릴 때 부모님을 따라 수유리의 산 밑에 있는 영락기도원에 가곤 했는데, 그 기억 속 풍경과 비슷하기도 하다. 실제로 독일에 와서 나의 하루는 6시에 시작하여서 21시 혹은 22시에 잠자리에 들게 되는데 약간 수도원 생활 비슷하기도 하고, 아침에 버스를 타러 마을의 언덕을 내려가면 각양각색의 새들의 노래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특유의 상쾌한 아침공기가 영혼을 고양시켜준다. 이 동네에는 버스가 1시간에 한대가 오고, 그것마저도 저녁이 지나면 끊기는데, 현재까지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그냥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시내에 있는 ThulB(튀링겐 주립 대학 도서관)에 가서 하루종일 논문을 위한 공부를 하고, 점심에 짧은 휴식을 하고 나머지 연구를 하다가 17시 즈음에 버스를 타고 돌아와서 아내와 저녁식사를 하고나면 그걸로 하루 일과가 끝나는 것이다. 주말에는 버스가 다니지 않지만, 운동할 겸 25분 정도 걸어서 나가면 트램 정류장이 있기 때문에, 트램을 타고 시내에 나가거나 (혹은 나가지 않거나) 주일에 교회에 가면 될 일이다. 4월부터 학기가 시작되면 아내와 나는 Deutschkurs(독일어수업)을 각자 듣게 되는데, 수업이 버스 막차가 끊기는 시간에 끝나게 된다. 그래도 상관없다. 저녁에 같이 산책하듯이 손을 맞잡고 산골마을로 들어오면 될 일이다. Airbnb로 구했던 집인데 다행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우리 부부를 맘에 들어하셔서 우리가 있고 싶은 만큼 월세로 전환해서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참으로 감사하다. 예나는 학생도시이기 때문에 기숙사 신청을 해도 기숙사에 들어가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럼에도 이 작은 시골마을의 집이 있어서, 우리는 이번 학기가 지나고 다음 학기까지도 기다릴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런 걱정이 없이.

독일에 와서, 특별히 이 작은 도시 예나(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예나를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라고 부른다. 그들에게는 튀링겐 주에서 가장 큰 도시 에르푸르트도 마을일 뿐이다)에서도 외곽지역에 있는 작은 쿠니츠 마을에 와서 삶이 담백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 삶을 채우는 시간이 매우 단순하지만 부지런하고, 조급하지 않지만 차근차근 할 일들을 진행해가고 있고, 약간 더디게 일이 진행되더라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기다리게 된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도 없다. 미래라고 하는 시간양식 특유의 불확실성 앞에서 인간은 작아지고, 염려하고, 불안해한다. 그런데 그마저도 수도원같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 두려움 같은 것은 별로 없다. 사람들이 인생이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시간은 언제나 어떠어떠한 성취를 목표지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지나치게 되면 성취의 시간만이 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기다리는 시간의 지속은 그저 ‘빨리 지나가야 하는’ 터널 같은 것이 되어버린다고 어떤 독일 철학자는 말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신학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영원 속에서’ 살 수 있다. 영원 속에서 산다는 것은 내 삶이 질적인 성취의 시간을 이미 소유하였음을 믿는 존재방식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성취에 대해 목을 매고, 안달복달해도, 그 성취의 시점이 지나면, 또다른 성취를 향해 안달복달하는 것이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비극이다(별로 재미있는 사실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이미 내가 성취의 시간을 현재에 가지고 있다면, 그 미래가 아직 오지 않아도, 그것을 기쁨으로 소유하며 참되게 기다릴 수가 있는 것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넓은 지속을 모두 포괄하는 영원 속에 내가 거한다면, 나는 놀랍도록 넓은 지속 안에서 이미 미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정신나간 소리 같다고? 천만에, 역사 속의 신학자들은 이미 이 진리를 발견하고 전율하였으며, 기꺼이 영원 안에 거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나는 염려하는 길보다는 영원 속에서 평안함 가운데 자족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자족하는 사람은 어떤 것이 당장 손에 없어도, 평온하다. 성경은 ‘바울도 예수도 세상도 다 너희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욕심을 부추기는 구절이 아니라, 오히려 욕심을 내어버리도록 촉구하는 맥락 속에 있는 말이었다. 창조주 안에 거하고 있다면, 당장 손에 잡히지 않아도, 나는 나의 한계성 속에서 기쁨으로 자족할 수가 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내가 할 수 있어서, 내가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모든 능력을 지니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는 분 안에 거하기 때문에, 나는 든든하고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니, 나의 아버지가 되시니,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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