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친숙함과 외재성 - 26.02.2017 본문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친숙함과 외재성 - 26.02.2017

jo_nghyuk 2018. 4. 17. 02:44

독일 사람들은 참으로 근면하다. 나는 6시가 되면 눈을 뜨는 편인데 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노라면 창문 너머에서 새 소리가 들리곤 한다. 그런데 이 새 소리 이전에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 위층에 계시는 주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용하시는 물소리이다. 

오늘은 10시에 침대 커버와 베개 커버, 의자 시트등을 바구니에 넣어드리기로 했는데 이미 9시 40분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방문 앞에 와 계셨다. 시트 교체하는 법을 알려 주시려고 방 안에 들어오셨는데, 아차,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 방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음을, 아니 그보다 정돈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다니. 한국에서 가져온 짐은 각자 캐리어 하나에 이민가방 하나씩이었는데 우리 부부는 이제 미니멀라이프다 하고 자족하는 마음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물건들을 하나 둘씩 꺼내놓고, 나름 정돈을 해두었다 생각했는데, 침대 커버 및 시트를 놓는 통 위에 우리 부부의 바지라던가 하는 것들이 잔뜩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하는 자족하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생각이 있었는지 방 안이, 거실 안이 나름 정돈이 되어 있다고 여겼었던 듯 하다. 

타자는 나의 외재성이고, 초월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자의 출현은 나에게 또 하나의 객관적 관점을 부여한다. 그 관점 안에서 “이정도면 됐지”하는 자족함은 깨어진다. (이것이 치우치면 자기검열이 되겠으나) 이러한 객관적 시점은 나라고 하는 존재를 다시 일깨워준다. “우리”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일인칭으로서의 복수관념이 아니던가. 고인 물이 썩듯이, 가만히 놔둔 집은 어수선해진다. 주말을 맞아 대청소를 하는데 바닥의 카페트를 털면서, 어찌나 먼지가 많이 나는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방에서 재채기를 하면서도 생각을 못했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숙한 모습인가. 

그렇기에 타자들의 관점을 단순히 도전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나에게 부족한 (결여된) 외재성이라고 인정하면 어떨까. 실로 독일 사람들의 리듬을 따라 살아보니 하루가 전혀 지루할 틈이 없다. 부지런하나, 조급하지 않고, 여유가 있으나, 늘어지지 않는다. 아마 각각의 시간대에 정해진 일과라고 하는 루틴이 있어서일 것이다. 지인과 이야기를 하면서, 루틴이라 하는 것은 단순한 지루함이 아니라 오히려 거룩함이고 신실함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벽에 있어나 아침을 드시고, 운동을 나갔다 들어오면 정원 손질을 하고, 다시 수영을 하러 대학이 있는 시내로 나갔다가 들어와서는 빨래를 하시고, 저녁 식사를 하며 티비를 보는 것이 일과인 듯 하다. (나는 이 대부분을 벽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추론하였다) 

독일에 와서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소셜네트워크를 하는 시간이 거의 없어졌다는 것이고, 시골에 살면서 여러가지 정보의 홍수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굳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굳이 메시지를 확인하지 않아도, 등록이 좀 늦어져도, 논문이 좀 늦어지고, 읽는 속도가 아장아장거려도, 그게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삶에 여유가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예전보다 좀 더 깊게 들어가 웅크려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중이다, 조금씩.

어쩌면 그러한 삶의 패턴도 독일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나라와의 관련 속에 놓여지게 됨으로 주어진 것은 아닐지. 정확성과 꼼꼼함, 부지런함과 각각의 시간의 폭을 인정하는 여유에서 오는 자유함. 그러나 그 자유가 방종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잡아주는 법과 시민의식의 공동체성. 네덜란드에 머물 때와는 전혀 다른 삶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엄격하고 깨끗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중이다. 엄격함과 깨끗함은 “이 정도”라고 하는 친숙한 기존성을 뚫고 들어오는 새로운 척도이다. 내 방에 들어오는 집주인처럼,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처럼 이는 삶의 새로운 질서이며, 새로운 방향성과 목표를 지니는 시간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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