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단순성 - 28.04.2017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단순성 - 28.04.2017

jo_nghyuk 2018. 4. 17. 02:49


유소년기에 읽었던 드래곤볼을 다시 읽고 있다. 이번에는 공부도 할 겸 독일어 판으로 읽고 있는데, 1권부터 도리야마 아키라의 단순성에 대해 감탄하며 그의 화풍을 즐기는 중이다. 어린 시절에는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컷과 컷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었는데, 지금은 독일어 해석 겸 그림체 감상 겸 천천히 만끽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은 드라마를 볼 때 그 방대한 스토리를 빨리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키보드의 화살표를 주구장창 누른다는데, 어쩌면 나는 정반대의 길을 가는지도 모르겠다. 결과라고 하는 것은 과정의 성취이다. 그런데 그 결과물 역시 경험으로서의 과정이 아니던가. 결과, 성취라고 하는 그다지도 짧은 지속을 위해 긴 과정의 지속을 무로 만들어 버리는 것만큼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결국 우리는 긴 평화의 지속을 갈망하고, 긴 향유의 지속을 갈망하며, 긴 사랑의 지속을 갈망하도록 지어진 존재인데, 사실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여정의 끝에는 이러한 갈망에 대해 스스로가 세워놓은 목표라고 하는 것이 자리하고 있다. 지도 북쪽의 끝까지 가본다든지, 괜찮은 커피머신을 산다든지, 어학의 상당 수준에 오른든지, 그럴듯한 논문을 꽤 작성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다 목표이고, 그 목표설정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목표를 향해 가는 도상이 ‘아무것도 아닌’ 단지 전경 뒤의 배경으로만 쇠퇴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간은 참으로 짧지 않은가. 그 짧은 기간을 행복하게 보낼 수도 있고, 미래를, 다만 미래만을 기다리며 꾸역꾸역 살아낼 수도 있는 것이다. 더 슬픈 일은 꾸역꾸역 사는 현재의 삶은 미래를 별로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래를 기대하면서 현재를 향유할 순 없을까. 과거에 매이지 않고 다만 기억하면서 다가오는 미래를 향해 방향설정할 순 없을까. 다가오는 미래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고, 지난 과거도 죽음이 아니라 생명으로 가득하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만을 기억하는 대신, 그와 보냈던 행복한 시간들을 추억한다.

‘깨어 있으라’ : 미래를 참되게 보는 자는, 살아있는 현재에 참여할 것이다. 성서는 versteckte Herz와 verborgene Augen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음과 생각이 가리워져 있는 것이다. 무엇으로? 거짓말로.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진리의 드러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드러남의 빛은 우리 시간 영역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충일하다. 보려 하지 않거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가리워져 있는 시야를 가지고 보려고 할 것이다. 또 세상의 많은 염려와 재물에 매여서 마음이 erstickte werden이 되는 자는 말씀의 씨를 마음 밭에 받지 못할 것이라고 루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독일어로 표현하였다.

다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 없음을 깨달으라.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을 가진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만을 갈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얻는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기대를 없어질 것들에 걸지 않는다. 그는 없어질 것들을 관리하는 자이며, 돌보는 자로서 부름 받았다. 우리의 시간도 ‘소모된다’ 공간도, 에너지도 소모되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로’ 무한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없다. 어떻게 소모하며 살 것인가. 두려워하지 않고 나누는 사람은 재물로서 살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사람이요, 자유의 초대에 응하는 사람이다. 나는 증명하기 위해 버리지 않는다. 사랑의 초대가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보았고 들었기 때문에 밭에 있는 보화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은 신기하기도 하지, 없어지고 소모되어지는 세상 속에서 ‘무한한 생성’에 참여하게 된다. 마르지 않는 샘과 같고 물 댄 동산과 같아서, 그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폭포를 등지고 있는 물가의 나무처럼 청청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무가 아니기를 바라지 않고, 나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으면 하고 염려하지 않는다. 그는 나무로서 나무답게 살면서 나무가 무엇인지를 발견해나가는 기쁨을 누린다. 이 놀라운 단순성의 기쁨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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