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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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의 간

4월 4일의 수기, 그림

jo_nghyuk 2019. 4. 5. 00:11

4시까지 연구를 하다가 머리 속에 부드러운 것이 다 고갈된 상태가 되어서 커피를 한잔 마시러 도서관을 나섰다. 커피를 다 마시고 건너편에 화랑이 눈에 띄었다. 유화 그림들이 차창 안으로 진열되어 있었다. 색이 있는 것들을 보면 이상하게 위로를 받는다. 나는 내 그림에 색을 칠한 적이 없다. 색감은 정서나 기분을 표현하는 것인데 나는 줄곧 스케치만 해왔었구나. 

나의 고모는 화가였다. 고모가 마당 벽에 커다랗게 유화를 그렸을때, 그것을 보고 최초로 그림을 멋지다고 느꼈다. 당시의 나는 초등학생 아니면 중학생이었고, 고모는 정원사처럼 회색 벽을 초록 정원의 나무와 강으로 수놓았다. 내가 그림을 들고 가서 보완해야 할 부분을 물으면, 고모는 그냥 그대로가 좋다고 늘 말했다. 그냥 그대로가 좋다고. 

카페 건너 화랑 앞에 서서 뜬금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다: 나도 유화를 그려볼수 있을까. 색이라는 것을 칠해볼수 있을까. 

나도 원체 음악을 좋아하지만 이 도시에 와서 가장 부러운 이들은 바우하우스를 다니는 학생들이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원초적인 취향에 가깝다. 사람에게는 함양해야 하는 제 2의 본성으로서의 습관이 있고, 가만 놔두어도 저절로 그리 가는 제 1의 본성으로서의 습관이 있다고 한다. 가장 아팠을 때에 내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면, 나에게 있어서 그림은 어릴 적부터 스스럼없이 친해진 친구와도 같았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작가의 꿈을 꿨다면, 태어나서부터 내 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사 깨닫는 거지만, 내 꿈은 화가가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고, 작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것이 아니었는지. 꿈이 직업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작가들이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글쓰기인 것처럼 말이다. 

나의 하루 일과는 도서관에서 오전에 연구를 하고,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공원을 걷고, 다시 연구를 하다가 머리가 딱딱해지면 그림을 그리고, 다시 연구로 돌아가는 단순한 패턴이다. 머리가 딱딱해질 때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어떡할 뻔 했나, 하고 생각할 정도다. 나는 하루에 그림 하나만 그리면 되는데 (벌써 화가를 직업으로 삼기엔 실격이다), 공부를 하다가 중간에 머리가 복잡해지면 아무 분석적인 노력이 없이 그냥 그림을 그린다. 심지어 집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를때도 여러번 연습하는데, 그림은 연습할 필요가 없어서 그냥 그대로 좋은 것이다. 지우개도 많이 쓰지 않고, 손이 가는대로 그리면, 고모가 말해준대로 '그냥 그 모습대로 좋은 것'이다. 

솔직히 내 블로그에 지인이 거의 오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교토에 가면 나는 꼭 산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겨드랑이가 깊은 산일수록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굴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레비나스의 표현대로 사람은 가장 자기다운 행동을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게 된다고 한다. 이번 여름에 교토를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무엇을 먹을지 고민도 안된다. 그냥 숲속을 걷고, 산 속으로 들어가고, 니신 소바를 먹고, 저녁에는 목욕탕에 가고, 아침에는 묵상을 하고, 밤에는 기도를 하고, 가모가와 강가를 걷고, 만화책을 사고, 나와 비슷한 수수한 옷차림의 사람들 사이에서 대학가를 거닐다가 돌아오면 될 일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에게 가장 자연스럽다. 그렇게 수수하게 사는게 좋다. 고모의 이름은 '순이'다. 고모 이름처럼 나도 얌전하게 도서관이나 숲속이나 작은 도시에 처박혀서 사는 걸 좋아한다. 그 사람의 성향이 그 사람의 운명daimon이라고, 반대로 운명은 그 사람 성향이라고, 소크라테스 형이 그랬다. 교토를 처음 방문하던 2004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많이 밝아졌고, 많이 쾌활해졌고, 많이 따뜻해졌으나, 여전히 내향적이고, 숨는 것을 좋아하며, 순한 것에 마음이 끌린다. 어릴 적에는 신학을 하기 싫다고 아버지와 늘 다투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신학을 해서 참 다행이다. 히키코모리가 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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