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5월 4일의 수기, 살자. 본문

오랑쥬 껍질 씹기

5월 4일의 수기, 살자.

jo_nghyuk 2019. 5. 4. 22:52

독일은 봄 중간에 겨울이 껴있기라도 한 것인가. 아침에 눈발이 거세다. 봄에 진입한지 한참 지났는데도 눈이라니? 이제 다시 해가 뜬다. 나는 아침에 일찍 번역 업무를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울에 가서 할 오후 집회 설교 작성과 수요 예배 준비와 목요일의 비자 갱신을 위한 서류들을 차분하게 하는 것이고, 서울과 교토의 지인들에게 줄 작은 것들을 준비하는 일이다. 그 외에는 하지 말자, my priority.

신문을 보니 40대가 되면 한주 25시간 이상 일하는 것이 생산성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나는 아직 3년 남았는데도 지극한 공감이 간다. 20대의 치열함은 이제 먼 이야기인가. 성경공부를 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목사님이 부드럽게 타이르신다, 청년들 너무 잡지 마세요. 최근에 목이 쉰 것이 너무 오래 간다. 너무 무리했던 것일까. 스스로가 날이 서니 서슬퍼런 도깨비가 되지나 않을까 염려했는데, 목사님의 말씀은 적확했다. 스스로 보기에도 간당간당했었다. 의지를 내어 쿨 다운cool down하고 성령님께 자리를 내어드린다. 리더교육을 하는데 위로와 격려와 사랑이 넘친다. 

교육 후 한 청년의 집에 두런두런 모여 떡볶이를 먹는데 어머니가 젊으실 적에 고등부 형 누나들을 불러다가 집에서 떡볶이를 먹으며 하하 호호, 웃으며 귀염을 독차지하던 나의 어린 때가 생각이 난다. 그래, 어쩌면 나는 가장 따뜻해져야 할 봄에 생뚱맞은 눈처럼 차가운 것을 준비하며 지나치게 작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힘을 빼고, 성령에게 공간을 내어드리니, 그분께서 해야 할 말을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 정확하게 하신다. 무엇을 굳이 하려 하지 말자. 그냥 즐겁자. 같이 살아나자. 함께 기쁘자. 

서울에 있는 지인과 교토에 있는 지인과 동시에 채팅을 했다. 뭘 먹든지 뭘 하든지 그냥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걸 먹을까, 저걸 먹을까 많이도 얘기했지만, 난 다 중요하지 않다. 뭘 먹어도 되고, 뭘 못 먹어도 그만이다. 그냥 그렇게 웃고 떠드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즐거운데, 강변이나 걷고 100년이나 된 카페가 수두룩한데 아무 곳에 들어가도 놀라울 듯 싶다. 여력이 되면 북쪽 산으로도 가고, 서쪽 강으로도 가겠지만, 안되면 뭐, 그냥 도시샤 대학의 학생식당에서 냉소바를 먹어도 그만인 것이다. 숙소는 같은 교단의 선교사님이 개척하신 교회 건물인데 일본식 가옥으로 되어있고, 매일 아침 기도회가 있으며 데마치 야나기의 가모가와 상류 바로 앞이다. C'est trés parfait, très. 이렇게 다 예비해놓으셨는데 무얼 염려해서야 되겠는가. 그냥 누리면 될 일이지.

잘 하려고 하니까 자꾸 기합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삶을 좀 minimalisieren하는 것은 어떨지. 집 안에 이 가구 저 가구 이 제품 저 제품 이 옷 저 옷 많지만 사실 공간만 차지할 뿐 내 삶에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관련이 없을 때가 많다. 그럴 때면 그냥 비우면 될 일이고, 치우면 될 일이다. 본질이 아닌 것은 다 걷으면 될 일이다. 그걸 부여잡고 고민하면 계속 빙글빙글. 

자기 삶의 기준이 명확하면 타인에게 덜 관대해질 수 밖에 없다. 내 기준을 나도 채우느라 허겁저겁, 다른 사람이 그걸 못 채우면 못마땅, 그리고 그 못마땅한 나를 채근하고 설득하느라 시간을 발바닥이 뜨거워지도록 낭비하는 거다. 기준과 관점을 내려놓으라. 그러면 화해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용서가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인애함이 무엇인지 온유함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데에 인내가 많이 필요하다면 그만큼 내 허들이 높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나에게 오는 길의 진입장벽부터 낮추어야 가볍게 일들을 처리할 수 있다.

지인이 옆 도시에서 기타를 빌리러 온다고 한다. 나는 몇시에 출발하고 몇시에 반호프에 도착하는지 알려주기를 원하지만 그런 건 없다. 그럼 그냥 크레페를 먹으며 기다리거나, 서점에서 여행 관련 책자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면 될 일이다. 역시 지인은 생각보다 다소 늦게 도착했고 미안해했다. 그런데 그게 뭐 사는거 아닌가? 차라리 나라서 다행이라고, 우리 관계여서 늦지만 안심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더 고맙고 기뻤다. 내려놓고,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나의 관점이고 나의 고집이며 나의 기준이며 나의 허들이다. 잘 하려고 하는 마음, 완벽하려는 관념, 지나친 열심과 효율적인 삶에 대한 그림을 내려놓기만 하면 자유가 찾아온다.

그래 사실 5월에도 눈이 올 수도 있는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사람이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너무 힘차게 살지 말자.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자. 나도 잘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 기대하지 말고 그냥 사랑하고 용납하자. 지구도 불완전하고 우주도 불완전하고 인간도 불완전하다. 현존재는 다 불완전하고 그래서 불안해한다. 그냥 가서 묵묵히 안아주고 토닥여주면 될 일이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할 말을 줄 것이고, 방향을 줄 것이다. 그때까지 힘을 빼자. 힘을 빼고 나는 교토로 향하는 그날을 기다리고, 독일에서, 서울에서 할 일을 묵묵히 조용히 수행하면서 남은 일주일을 보내리라. 

여백을 두자. 한주 25시간 외에는 비워두자. 살자, 죽지 말고. 울지 말고, 웃자. 기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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