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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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5월 12일의 수기

jo_nghyuk 2019. 5. 13. 01:14

20시에 자도 24시에 눈이 떠진다. 시차 적응을 하는 몸은 솔직하다. 너무 개운해서 이번에는 아침까지 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몸은 13시에 낮잠을 잔 것으로 계산해서 15시에 나를 깨운 것이리라. 낮잠을 잤다고 생각하고 개운한가 보다. 그럼 또 04시가 되어야 잠이 오려나. 아무튼 나는 개운한 상태로 5월 13일 새벽에 12일의 수기를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어제도 04시가 지나서야 잠이 들었고, 09시에 눈이 떠졌다. 씻고 오랫만에 모교 앞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독일에서는 지갑 따위에 카드가 들어가 있으면 카드 리더기가 읽지를 못한다. 지갑 안에 있는 카드를 인식한다는 것 자체가 신세계다. 한국이 선진국이고 독일이 후진국인 것 같이 느껴진다. 다만 모든 사람들이 지나치게 바쁘고 조급하고 신경을 많이 쓴다는 인상은 받았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앞에 사람이 있는데 팔을 집어넣어서 카드 리더기에 카드를 찍어놓는 풍경은 (나도 그렇게 살았었을 텐데) 참 생경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강남의 교회에 갔다. 모든 사람들이 반겨주었고, 집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친한 목사님과 커피를 마시고, 오후에는 설교를 전하고, 기도를 인도하고, 예배가 끝나고, 청년부와 교제를 하고, 기도를 받고, 격려를 하고, 권사님들과 교제를 하고, 기도제목을 받고, 판교에서 미팅을 하고, 학동역에서 또 만남을 가지고, 그리고 광나루로 돌아왔다. 이틀째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어짜피 늦게까지 잠을 못자니 사람이라도 만나는 것이 유익한 것 같기도 하다. 일본에 갈 때쯤이면 시차에 적응이 되어있기를 바란다.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난다. 사려깊은 사람일수록, 기준이 높다는 생각을 다시금 한다. 기준이 높을수록, 다른 방식들에 대해 다소 배타적인 관점을 취하게 되기도 한다. 관용적인 사람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서 허들이 낮지만, 냉철하고 차분한 사람은 그만큼 삶의 구획도 많이 지어져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그르다고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냉철함과 관용의 적절한 균형도 생각해보게 되었고, 게릴라처럼 부드럽게 이 사람과 저 사람의 경계를 넘나드는 삶도 꿈꾼다. 지도교수님의 신학교 채플에서 있을 설교의 기도문을 번역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구획지어놓은 것보다 더 크게 역사하시니 우리도 구별됨을 잃지 않으면서도 경계를 넘어 하나됨을 향하게 하여달라는 대목이 인상깊다. 기준은 사람이 만든다. 옳고 그름도 사람이 만든다. 그런데 그런 것만이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 점차 살면서 깨닫게 되는 지혜이다. 

오후 예배 설교를 하는데, 더 힘이 있어지고, 많이 웃고, 율법의 딱딱함이 아니라 복음의 현실성이 주는 확신의 부드러움으로 말하는 스스로를 느낀다. 힘이나 능이 아니라, 성령이고, 기도이다. 바이마르에서 기도훈련을 한 열매를 점점 경험하는 중이다. 틀이 없으면서도 있다. 필요할 때면 예수께서 그러하셨듯, 다소 틀을 벗어나 사람을 살린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틀을 벗어나련다. 물론 그러면서도 냉철한 심사숙고는 함께 가야하겠지만, 예수는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되기를 바라셨다. 비둘기처럼 먼저 순결하고, 그리고 나서 뱀처럼 지혜롭기를 바라셨다. 여러 경계와 구획과 인간이 만든 허들을 넘어서는 공동체적 삶을 나는 꿈꾼다. 함께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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