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꼴라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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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쥬 껍질 씹기

6월 2일 수기, renewal

jo_nghyuk 2019. 6. 2. 19:21

쓰던 맥이 운명하셨다. 팬소음이 점점 심해지더니 전원공급마저도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로직보드가 망가진 모양이라 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새 것에 가까운 2017년형 맥을 사기로 결심하고 프랑크푸르트에 아내와 함께 다녀왔다. 전에 쓰던 주인이 간호사라 실기스 하나 없이 깔끔하다. 아아 조심스러워라. 

다시 운영체제를 깔고, 아이클라우드를 연동하니 온갖 잡스러운 이전 파일들이 와이파이를 타고 날아와 컴퓨터에 내려앉는다. 에버노트에 기입한 글들도, 드랍박스에 든 파일들도 어지러진 방처럼 느껴졌다. 새 컴퓨터를 사서 그런지 이전 것들이 추저분하게 느껴진다. 서랍정리를 하듯이 폴더를 만들고 비울 것을 비우는데 반나절이 걸렸다. 미니멀리즘과 정리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누군가 버리기 위해서 줄이는 것이 아니라 잘 쓰기 위해 비운다고 말했었던 기억이 난다. 과감하게 버려 주어야 정리가 시작된다. 그런데 또 어떤 것은 솔로몬의 말처럼 소의 힘을 쓰기 위해 추저운 구유가 필요한 법이다. 해석학적 순환이다.

1박 2일의 여행에 굳이 킨들을 넣지도, 카메라를 넣지도 않았다. 가방에 린넨 셔츠 여벌만 넣고 가볍게 다녀왔다. 굳이 무얼 하려고 하지 않는게 더 좋았다. 골목을 드나들고, 산자락을 즐기고. 기차역에 다다를 때면 산 속으로 가만히 들어가 정차하는 듯한 그런 느낌이 참 좋다. 부숴져서 빈 공간이 많은 산 위의 성은 청수사의 여백을 생각나게 한다. 아내와 무얼 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조용조용히 다녀온 그런 여행이었다. 

새로 산 이 컴퓨터는 기본형이라 용량도 적어서 이 작은 녀석을 가지고 굳이 뭘 하려고 하지를 않는게 편안할 듯 싶다. 그냥 논문과 설교 작성을 위한, 간간히 블로그를 하고 카메라에서 클라우드로 사진을 옮겨다 주는 그런 용도로 써야 할 듯 싶다. 스키폴 공항처럼 비행기들이 사뿐히 내려왔다가 훌쩍 날아가듯이 사진이나 문서들도 클라우드 위로 툭, 올려놓으려 한다. 좀 더 몸체를 가볍게 하고 훌훌 나는 새처럼 그렇게 2019년의 하반기를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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